2009년 3월 20일 금요일

중세 프랑스에서 ‘양자제’의 이념과 실상

지은이: 유희수(고려대)

※ 메모: 

게로-잘라베르(A. Guerreau-Jalabert)에 의하면, 양자제란 “친부모가 타인에게 어린이에 대한 친권을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양도하여 새로운 합법적 친자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이러한 의미의 양자제는 고대 로마와 서양 현대에 적용된다고 보았다.4) 그러나, 고대 로마의 양자제는 19세기처럼 유기된 어린이 문제의 ‘인도주의적’ 해결책도 아니요, 현대의 입양제처럼 불임에 대한 표준적 해결책도 아니었다. 로마에서 양자제는 이름?재산?제사의 상속 및 계승 등과 같은 하나의 가문 전략이었다. 특히 로마 귀족 사회는 이러한 가문 전략의 구사에서 중세와 근대에서보다 더 큰 자유를 누렸다.5) 여기서는 고전기 로마 시대 중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양자제에 관한 문헌이 비교적 많이 있는 기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로마에서 양자제는 결혼처럼 사회적 유동성의 출구 역할을 했다. 베인(P. Veyne)이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특히 좋은 혼처에 딸을 내어주었듯이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6) 로마법에는 두 가지 형태의 양자제가 있었다. 하나는 ‘부권’(patria potestas)으로부터 ‘독립된’(sui juris) 자가 다른 사람의 ‘부권’에 들어가는 ‘성인 입양’(adrogatio)이고, 다른 하나는 생부의 동의 아래 다른 사람의 ‘부권’에 들어가는 ‘본래적 의미’의 입양(adoptio)이다.7) 고전기 로마법에 의하면, 양자는 새가문의 완전한 적통으로 들어가서 친자의 권리와 상속권을 부여받았다.8) 양자 입양의 목적은 가문 숭배와 이름의 계승을 통한 가문의 소멸을 막는 것이 기본이지만, 상류층과 황실에서는 보호-피보호 관계망의 공고화, 황위 계승 확보 등과 같은 사회적?정치적 목적을 띠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클라디우스가 네로를 양자로 삼은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로마에서 양자제가 보편화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가족’(familia)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비록 친족 유대를 형성함에 있어서 생물학적 유대가 기본적 역할을 했지만, 가족 유대는 양자제와 같은 법적 구축물을 통해서도 형성될 수 있었다. 로마는 후대에 비하여 친족 집단의 형성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가부장’(paterfamilias)은 유언을 통해 상속자를 지명하는 데 있어서 자유로웠다. 한 가문에 태어난 어린이가 자동적으로 종원(宗員)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실에서 태어난 신생아를 버릴 것인가 살릴 것인가, 상속자로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가부장’의 권한이었다. 로마의 이러한 ‘자의적 부권’(voluntary fatherhood) 개념은 첩의 자식을 양자로 삼을 수 있게 만들었으므로 서출이 적출과 확연하게 구별되지도 않았다. 이런 점에서 로마 가족은 후대에 비해 생물학적 실체라기보다는 ‘가부장’에 의해 결정되는 법률적 집단이었다. 베인이 지적하듯이, “양자제의 빈번한 실천은 혈통이 로마의 가족 개념에서 하찮은 역할을 한 또 다른 증거이다.”9) 이처럼 공화정말과 제정초의 양자제는 ‘자연 친자관계’(filiation naturelle)의 기본 준칙을 와해시킬 정도로 발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제와 자연 친자관계가 적대 관계는 아니었다. 이혼이 로마식 결혼의 한 요소였던 것처럼10) 양자제는 가산과 가문명의 상속 전략, ‘부권’에의 접근 수단이었다.

로마의 양자제 전통은 제국 말기의 법적 침묵 기간을 거쳐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법에서 약화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양자제법 개혁은 결혼과 생물학적 유대를 가족의 초석으로 삼은 기독교의 새로운 가족관을 반영한다. 이제, 가족은 고전기 로마법에서처럼 사회적 집단이나 법률적 집단이 아니었다. 교회의 이데올로기에서 결혼과 출산이 점점 더 중요시되던 시기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이 창안한 ‘덜 완전한 양자제’(adoptio minus plena)는 이제 고전기 로마에서처럼 입양에 ‘부권’이 반드시 개입되는 것은 아니었다.11)

2. 중세 교회법에서의 양자제

가톨릭 교회는 종교법에서 양자제를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양자제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그것은 현세의 상속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사후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혼외 관계에 대한 교회의 엄격한 입장은 양자제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합법적 결혼만이 성행위의 유일한 배출구이며 가족 창출의 유일한 창구로 인정했던 교회의 성규범의 관점에서는 양자제가 서출을 적자로 만드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12)
친족제 역사가들은 로마 시대 이후 양자제가 쇠퇴 내지는 소멸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구디는 “로마법에서는 지배적 위치를 점했던 양자제가 갑작스럽게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슐츠는 양자제 법이 고전기 로마 이후 급격하게 개혁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평가하기 위해 중세의 법 전통에서 양자제가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게르만 법에서는 affatomia, thinx, garenthinx 등과 같은 일종의 양자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자유민총회’(mallus)에서 왕이 참석한 가운데 공적인 계약과 의례 절차를 거쳐야 했다.13) 입양된 사람은 양부모의 생전에 그들로부터 재산 상속을 받았다. 그러나 양부는 생전에 그것에 대한 용익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양자는 양부모의 사후에 상속 재산에 대한 완전한 처분권을 획득하고 친자와 동일한 권리를 보유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양자가 양부모의 노후에 효성을 바치는 대가로 상속권을 보장받는 일종의 ‘상속입양’(adoptio in hereditatem) 또는 ‘상속인 계약제’이다.14) 입양 자격은 아들이나 딸이 없는 사람만 해당되었다. 로마와는 달리 혈통 관계가 중시되었으므로, 양부모가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이 계약은 파기되었다. 입양 주체와 대상에서 남녀에 차별이 없다는 점도 특징적이다.15) 이러한 제도는 6~7세기에 편찬된 프랑크 부족법과 롬바르드 부족법에만 나타나고 있을 뿐, 서고트족, 부르군드족, 알레마니족, 바바리아족, 앵글로-색슨족 등의 법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제도가 더 로마화한 고트족과 부르군드족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게르만 고유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16)
중세 교회는 서유럽에서 양자제가 법적으로 소멸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아왔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입양의 사례를 먼저 살펴보자. 구약에서는 입양의 사례가 두 번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파라오의 딸이 강가에 숨겨진 아기를 데려다 “자기의 아들로 삼고”(adoptare in locum filii)17)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고(출애굽기 2: 10), 다른 하나는 부모를 여읜 에스델이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양녀로 들어간 일이다(에스델, 2: 7). 구약에서는 시동생이 미망인 형수와 결혼하는 수혼제(levirate)말고도 입양이 실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인간 입양’(adoption humaine)에 대한 직접적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바울은 구원 신학과 관련하여 ‘신의 입양’ (adoption divine, 신에 의한 인간 입양)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기독교도들은 세례를 통한 하느님의 자식으로 간주된다.18) 신학적 입장에서 이러한 ‘신의 입양’은 이중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친자관계를 “모방하고 재생”하지만, 제2의 부권을 이룬다는 점에서 ‘인간 입양’에 비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적 선물의 내림’이라는 점에서 본래적 의미의 생식과 순수한 의미의 입양의 중간적 지위를 갖는다.19)
그러나, 중세초 기독교 저술가들은 상속전략으로서의 양자제의 실천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5세기에 이러한 변화를 대표한 사람은 마르세유의 사제 살비아누스(Salvianus)이다. 양자제는 교회의 모든 ‘가족’에보다도 세속적 상속에 과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식을 양자로 삼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리하여 자식들의 유대에 매어 있지 않은 비참하고 불경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영혼의 목을 죄는 사슬을 스스로에게 제공한다.”20) 그가 양자제를 비난한 이유는 그것이 빈자나 하느님(교회)에게 보시를 하여 영혼을 구제하지 않고, 탐욕스런 친족을 살찌우고 동시에 가문 숭배를 영속시키는 가문 전략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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