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존 버거 외, 《이미지 Ways of Seeing》, 번역 5판(1996)/번역초판(1990), 편집부 옮김. 동문선 펴냄.
사물을 본다는 행위는 언어보다 선행한다. 어린이는 말할 수 있기 전에 사물을 보며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보는 것이 언어보다 선행한다는 것에는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계에서 우리들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들은 이 세계를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언어는 우리들이 그 세계를 보고 있고, 그 세계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과의 관계는 항상 불안정하다. 황혼이 질 무렵 우리는 태양이 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지구가 그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식이나 설명이 그 광경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와 보는 것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차이를 그의 작품 《꿈의 열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해 내고 있다.
우리들이 사물을 보는 시각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중세 사람들이 지옥의 실재를 믿고 있었을 때에는 불의 광경이 갖는 의미는 지금과 훨씬 달랐을 것이다. (...) 또 사랑을 하고 있을 때 사랑을 믿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어떠한 말이나 포옹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함을 지니고 있다.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성행위의 순간 정도가 아닐까 한다.
(...) 우리는 시선이 미치는 범주내에서만 보게 된다. 그리고 보는 것은 선택이다. 이 선택 행위에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포함된다.
(...) 눈을 감고 방 안을 걸으며 촉각 기능이 시각의 한정된 정적인 시각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보자.
존 버거, 《이미지 Ways of Seeings》 2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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