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일요일

[발췌:애쓰모글루/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3장, 번영과 빈곤의 기원


출처: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2012).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옮김/장경덕 감수/시공사 펴냄.
원제: 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
기타자료: 구글도서

※ 발췌 (excerpts): pp.113~...

* * *

3장 번영과 빈곤의 기원

3.1 38선의 경제학

( ... ... ) 남한 국민의 생활수준은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와 비슷하다. 38선 이북의 북한은 샐활수준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나라와 비등하다. 남한 평균 생활수준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북한 주민의 건강을 더 열악핟. 북한 주민은 평균적으로 38선 이남 동포보다 10년은 수명이 더 짧다. ( ... ... ) 1990년대 후반까지 남한은 성장을 계속하고 북한은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겨우 반세기 만에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나라의 소득 격차는 열 배까지 벌어졌다. 실로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 ... )


3.2 착취적 경제제도 vs. 포용적 경제제도

( ... ... ) 경제제도가 포용적이라는 것은 사유재산이 확고히 보장되고, 법체제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며, 누가나 교환 및 계약이 가능한 공평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히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또한 새로운 기업의 참여를 허용하고 개인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 ... )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도입되면 경제활동이 왕성해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사유재산권 보장이다.  ( ... )

  1680년 잉글랜드 정부는 서인도제도 식민지 바베이도스Barbados에 대한 인구조사를 시행했다. 조사 결과 총인구 6만 명 중 3만 9,000명이 아프리카 노예로, 나머지 인구 3분의 1에 예속된 재산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실 대부분은 가장 규모가 큰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는 175명의 재산이었다. 이들은 토지도 대부분 소유했다. 대형 농장주는 토지는 물론 노예에 대한 확고한 재산권을 보장받았다. 한 농장주가 다른 농장주에게 노예를 팔고 싶으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다. 법원이 그런 거래를 집행해주었기 때문이다. 농장주가 작성하는 어떤 계약도 법적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섬에 있는 법관과 치안판사 40명 중 29명이 대형 농장주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최고위 군 지도자 8명도 대형 농장주였다. 바베이도스의 엘리트층은 꼼꼼히 규정된 확고한 재산권과 계약을 보장받았지만, 포용적 경제제도가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섬사람 셋 중 둘은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부여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재능이나 기술을 사용할 능력 또는 인센티브가 없는 노예였기 때문이다. 포용적 경제제도가 자리 잡으려면 엘리트층뿐 아니라 사회계츠 전반에 공평하게 재산권과 경제적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확고한 사유재산권, 법질서, 공공서비스, 계약 및 교환의 자유는 모두 정부에 의존한다. 질서를 집행하고 절도와 사기를 방지하며 당사자 간 계약 의무 이행을 명령할 수 있는 강압적 역량을 가진 것이 바로 정부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 ... ) 이런 공공서비스는 상당수 시장과 민간 부문에서 제공할 수도 있지만, 대규모 조율이 필요한 경우 중앙당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법질서와 사유재산권, 계약을 강제 집행하고 때로 행심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으 하는 정부가 경제제도에 깊숙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정부가 필요할 뿐 아니라 정부를 이용한다는 뜻이다.

( ... ... ) 포용적 경제제도inclusive economic institution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속성을 가진 그런 제도를 우리는 착취적 경제제도extractive economic institution라고 부른다. 착취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3.3 번영의 원동력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포용적 시장을 만들어낸다. ( ... ... )

  포용적 시장은 단순히 자유시장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17세기 바베이도스에도 시장은 존재했다. 하지만 농장주 엘리트층에게만 사유재산권이 존재했으므로 바베이도스의 시장은 포용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바베이도스의 경제제도는 체계적으로 대다수 인민을 강압적으로 착취했고 직업을 선택할 능력과 재능을 활용할 기회를 빼앗았다. 노예시장도 그런 착취적 경제제도의 일부였다.

  ( ... ... )
  ( ... ... )
  ( ... ... )
  ( ... ... )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포용적 시장의 잠재력을 적극 활용하고, 기술혁신을 장려하며, 인재 육성에 투자하고, 수많은 개인이 재능과 업무 능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왜 그토록 많은 경제제도가 이런 간단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다.


3.4 착취적 정체제도 vs. 포용적 정치제도

  모든 경제제도는 사회가 만든다. ( ... ... ) 정치란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사회를 다스릴 규율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 ... ... ) 제도를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면 정치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이나 집단이 그 결과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 ... ) 요컨대 사회에 정치권력 분배가 그런 경쟁의 승자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게임의 결과를 결정하는 열쇠가 바로 그 사회의 정치제도라는 뜻이다. 정치에서 인센티브를 좌우하는 규칙이기도 하다. 정부를 선택하는 방법과 정부의 각 부분이 갖는 권한도 정치제도가 결정한다. 사회에서 누가 권력을 쥐며 그 권력을 어떤 목적에 사용할 수 있는지 역시 정치제도가 결정한다. 권력이 편중되어 있고 견제를 받지 않으면 절대주의 정치제도라 할 수 있다. ( ... ) 반면 사회 전반에 권력을 고루 분배하고 견제하는 정치제도는 다원적pluralist이라 할 수 있다. 한 개인이나 편협한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광범위한 연합이나 복수의 집단이 정치 권력을 고루 나누어 갖는 형태를 말한다.

  다원주의와 포용적 경제제도 간에는 당연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이 포용적 경제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다원적 정치제도뿐 아니라 중앙집권체제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나라가 바로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다. 소말리아의 정치권력은 언뜻 다원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오래전부터 고루 분배되어 있었다. 소말리아의 제도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어 실제로 누군가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반목이 심한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어느 부족도 절대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한 부족의 힘은 다른 부족의 무력으로만 제약을 받는다. 이런 식의 권력 분배는 포용적 제도를 낳는 게 아니라 혼란만 불러일으킨다. 이런 혼란의 근본적인 이유는 소말리아에 정치의 중앙집중화 또는 중앙집권체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 그렇다 보니 최소한의 법질서도 강제하지 못해 경제활동이나 교역은 물론 심지어 시민의 기본적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 )

  우리는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포용적 정치제도inclusive political institution라고 부를 것이다.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다면 착취적 정치제도extractive political institution라 할 만하다.

  ( ... ... )
  ( ... ... )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 간의 시너지 관계는 강력한 순환 고리feedback loop를 만들어낸다. ( ... ... )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 간에는 시너지 효과 이상의 관계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 .... ... ) 실제로 착취적 제도와 포용적 제도가 뒤섞이면 흔히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바베이도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포용적 정치제도하에서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시행한다 해도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 ... ... ) 마찬가지로 포용적 경제제도와 착취적 정치제도 역시 공존하기 어렵다. 포용적 경제제도가 권력을 가진 소수 엘리트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 경제제도로 변질되든가, 반대로 역동적 경제 덕분에 착취적 정치제도의 기반이 흔들려 포용적 색채를 띠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 ... ... )


3.5 왜 늘 번영을 선택하지 않는가


3.6 콩고의 오랜 시련


3.7 착취적 정치제도하의 성장



[발췌:애쓰모글루/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2장, 맞지 않는 이론들

출처: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2012).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옮김/장경덕 감수/시공사 펴냄.
원제: 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
기타자료: 구글도서


※ 발췌 (excerpts): pp. 106~110

판이한 길을 걸어온 미국과 멕시코를 보자. 두 나라 지도자들이 지적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면 억지스럽다. 존 스미스와 코르테스의 지적 수준이나 의도가 달랐기 때문에 식민통치 시적 두 나라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운명에 놓인 것이 아니다. 훗날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무지해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엘리트층의 배만 불리고 나머지 서민은 희생시키는 경제제도를 선택했고, 시오도어 루스벨트나 우드로 윌슨 같은 미국 대통령은 지적 수준이 높아 그 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다. 두 나라 대통령과 엘리트층이 서로 다른 제도적 제약에 직면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난 반세기 동안 불안정한 재산권과 경제제도 때문에 온 국민은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한 상황에서도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실정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으로 옳은 정책이라 믿어서가 아니라 국민을 희생시켜 축재하면서도 살아남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핵심 집단과 엘리트 층의 지지를 얻어내 계속 집권할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정치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1971년 코피 부시아Kofi Busia 가나 총리의 경험은 무시 가설의 오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시아는 위태로운 경제에 직면했다. 1969년 집권한 은크루마와 마찬가지로 부시아 역시 지속 불가능한 경제 확장정책을 추구했고 유통 조합과 고평가 환율을 통해 여러 방면에서 가격을 통제했다. 은크루마에 반대해 민주주의 정부를 이끈 부시아지만 가나의 역사가 길지 않았던 터라 은크루마와 똑같이 수많은 정치적 제약에 직면했다.

  은크루마와 마찬가지로 부시아의 경제정책 역시 그가 '무지'하고 그 정책이 좋다거나 국가 개발에 이상적인 방법이라 판단해 채택한 것이 아니다. 부시아는 예컨대 도시 지역 등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라 믿었던 것뿐이다. 가격 통제로 농민을 쥐어짜서 값싼 식품을 도시 유권자에게 제공하고 정부 지출을 지탱하기 위한 재원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이런 통제는 지속될 수 없었다. 가나는 잇따른 재정 위기와 외환보유고 부족에 시달렸다. 곤경에 처한 부시아는 1971년 12월 27일, 국제통화기금과 대규모 통화 평가절하를 포함한 협정을 맺기에 이른다. 

  ( ... ... )
  ( ... ... )
  ( ... ... ) 이런 변화는 중국 공산당이 농지와 산업의 공동 소유가 알맹이 없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할 뿐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니다. ( ... ) 중국이 공산주의에서 시장 인센티브쪽으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 계기 역시 효율적인 경제 운용 방법에 대한 더 나은 조언이나 이해가 아닌 정치였다는 뜻이다.

  
  세계 불평등을 이해하려면 일부 사회가 왜 그토록 비효율적이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짜여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어떻게 해서든 효율적인 제도를 채택해 번영을 이룩하는 나라도 가끔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사례는 극히 드물다. 경제 전문가와 정책입안자 대부분이 어떻게 '바로잡을지'만 몰두한다. 진짜 필요한 것은 왜 가난한 나라가 '잘못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들이 잘못되는이유는 대개 무지해서나 문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실수와 무지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뜻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논리나 최선택에 대한 전문가의 존언을 넘어 실제로 어떻게 의사결정이 내려지며 누가 그런 의사결정을 하고 그들이 왜 그런 의사결정을 내리는지 연구해야 한다. 다름아닌 정치 및 정치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정치를 외면해왔지만,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정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경제학자 아바 러너가 지적했듯이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꽃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이미 해결된 정치문제를 주요 연구분야로 삼은 덕분"이다.

  우리는 번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일부 기본적인 정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간 경제학은 정치적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가정해왔다. 세계 불평등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가정 때문이었다.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서로 다른 정책과 사회적 환경이 경제적 인센티브와 행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해야 하므로 경제학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치적 설명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발췌: András Sajó's] Abuse: The Dark Side of Fundamental Rights (2006)

출처: András Sajó ed. ^Abuse: The Dark Side of Fundamental Rights^. Eleven International Publishing. 2006.
자료: 구글도서


※ 발췌 (excer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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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ás Sajó

Preface


Fundamental rights have their dark side.[n.1] The darkness results from the abuse of fundamental rights in the public sphere. The problem of abuse in the present volume is very different from what is commonly understood as 'abuse of human rights' where authorities violate fundamental rights by simply denying them. The present concern is that even in democratic states, authorities and individuals claim human (fundamental) rights and the rule of law in ways that violate the fundamental rights of other people. In consequence of such actions, justice is denied. These consequences are often international or at least results from gross disregard that seems to raise issues of responsibility. For example, the rule of law is used to protect wealth amassed in more than dubious ways. Gianluigi Palombella argues that
the perspective of the abuse of powers or rights teaches us that we cannot just simply obey the formalism of the rule of law: not because it prevents justice in the single case, but rather because such formalism may not be able to control the 'legalistic' abuse of power that could lie concealed in it.
In other instances, reference to the public welfare serves to suppress fundamental individual rights; government authorities claim powers as their right in order to subvert the established balance of powers and move towards more arbitrary action and despotism.
[n.1] Earlier versions of the papers collected in this volume were presented in Budapest in 2005 at the 13th '^The Individual v. the State^' Conference. The conference was hosted by the Central European University, Legal Studies Department. The OpenSociety Institute, Budapest, provided generous funding for the conference. Special thanks are due to Zsuzsaa Kovacs and Lorri Bentch for editorial support. All quotes in the text of the Preface come from the respective chapters in this volume.
  Of course, as Martin Krygier reminds us, abuse of the rule of law and of rights cannot be addressed without asking what the rule of law and fundamental rights for. "[M]any things besides the law matter, and since societies differ in many ways, so will those things. So a universal, institution-based definition of the rule of law is implausible─and it will often mislead, it might well lead us away from the rule of law." Likewise, a concept of abuse of rights must be context-bound. In this regard, Andras Sajo discusses the historical transformations of abuse of rights, and Zdenek Kuhn's analysis of Polish court decisions adopted at the beginning of the communist dictatorship demonstrates that the road to tyranny leads through the abusive presentation of rights.

  These problems are not consistently reflected in constitutional law and in the jurisprudence of constitutional rights. Is there a doctrinal answer, a category that would capture these problems? Are these problems to be treated within the existing doctrinal categories, or would a doctrine of abuse of rights in constitutional and international law help in clarifying improper use of rights and the rule of law? Or, perhaps, most of the abuses are simply individualistic and narrow the social construction of needs and claims of justice in terms of individual rights.

  Most contributors to this volume are inclined to admit that in certain circumstances fundamental rights are used improperly, with troubling consequences, and that making us aware of such improprieties is necessary for the most efficient and just operation of the constitutional system. Beyond that agreement, the positions are divided.  

( ... ... )

2015년 5월 29일 금요일

Dic / Usages: to abuse rights, rights abuse

A. Usages of abuse as a verb include:

  1.

  • If someone is abused, they are treated cruelly and violently.
  • to maltreat, esp physically or sexually. 
  • to treat someone in a cruel and violent way, often sexually. 
  • to treat badly. 
  • to hurt or injure by maltreatment; ill-use.

  2.
  • If you abuse something, you use it in a wrong way or for a bad purpose.
  • to use incorrectly or improperly; misuse. 
  • to deliberately use something for the wrong purpose or for your own advantage; to treat something so badly that you start to destroy it.
  • to use wrongly or improperly or excessively; to change the inherent purpose or function of something.
  • to use wrongly or improperly; misuse.

B. Such phrases as 'to abuse rights(as a verb)', '(human-)rights abuse(as a noun)' seem to take for granted that the actor who commits such an abuse is not the rights holder whose rights are abused by that actor, but not always.


C. Some searches of its usages:

1. Technology must not be used to abuse rights. ... sanctions on foreign entities who help authoritarian governments use modern technologies to commit human rights abuses. ... [Link]


2. Why do governments abuse human rights? ... Because the abuse of human beings is abhorrent, we normatively expect governments to respect those rights. However, throughout human history, abuse of human [beings] has been the norm. Governments abuse rights because doing so helps leaders exercise, expand, or retain their power. Normatively, this is troubling. Yet as a positive matter, it should not be surprising. We begin the essay explaining why this is so, and then turn to the question that broadly captures the research agendas of those studying the topic of human rights: how can people constrain Leviathan? ... Domestically, democracy and economic output both reduce rights abuse, while large populations increase repression. ... For instance, the domestic judiciary of a country influences the extent to which human rights treaties constrain government abuse of rights. ... ... [Link]


3. Mental hospitals 'abuse rights' ... Chinese psychiatric patients are routinely subjected to abuse of their rights in a system that makes scant distinction between kinds of mental illness, an overseas-based human rights group said in a recent report. ... The report, titled "The Darkest Corners," details the grim conditions and human rights abuses faced by people who are committed to psychiatric care against their will ...  ... [some source]


4. The TSA really does abuse rights and take away freedom. ... [Link]


5. Businesses help China's government abuse rights. ... [Link]


6. these interventions were not sufficient to protect older persons from rights abuse within the healthcare context. ... the case today where some health workers abuse rights of the elderly through verbal, physical and psychological abuse. ... [Link]


7. In the fifth and final part of our series on the implications of a proposed international treaty addressing human right abuses involving businesses, IHRB's Salil Tripathi offers his reflections on the road ahead. ... because some companies knowingly or unintentionally abuse rights, ... corporate abuse of human rights ... corporate rights abuses ... [Link]


8.

The prevalent type of 'abuse' studied in Europe is the abuse of individual rights. ...

The more numerous constitutional rights are, and the more the state alleges that it has to promote one or the other constitutional right, the more likely it is that the state will abuse rights to the detriment of other (even fundamental) rights. The increasing constitutionalization of private relations creates situations where the right that is abused in a private relation is a constitutional one; likewise, constitutional rights are used in private relations and might be abused to the detriment of other interests. The constitutionalization of so many interests changes the position of fundamental rights. It seems to me that fundamental rights are not sufficiently protected against abuses committed in the name of other rights or governmental intrusions intended to foster rights. ... [some source]

2015년 5월 28일 목요일

Dic: yet (as a conjunction)


  • I don't eat much, yet I am a size 16.
  • It is completely waterproof, yet light and comfortable.
  • Kelly was a convicted criminal, yet many people admired him.
  • She does not speak our language and yet she seems to understand what we say.
  • a story that is strange yet true
  • an inexpensive yet effective solution to our problem
* * *

△You can use yet to introduce a fact which is rather surprising after the previous fact you have just mentioned. (=but)
△ Yet(2): used to introduce a fact, situation, or quality that is surprising after what you have just said.

* * *

CF. Similar usage as an adverb:
  • I saw yet another doctor. 
  • They would criticize me, or worse yet, pay no attention.
  • It is plain to see we will not have anything to eat yet again.
  • He got a call from the factory, telling of yet more problems.
  • Inflation had risen to a yet higher level.
  • Yet another reason to be cautious
  • The meeting has been cancelled yet again (=one more time after many others).

* * * 
△ You can use yet to emphasize a word, esp. when you are say that something is surprising because it is more extreme than previous things of its kind, or a further case of them.

△ used to emphasize that something is even more than it was before or is in addition to what existed before. (=still)

.... COBUILD, LDOCE

2015년 5월 26일 화요일

Dic: 무시하다, 일축하다, 묵살하다


무시하다: 

1. (존재나 가치를 알아주지 않다) ignore, disregard, neglect, pass over

  •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My opinion was passed over.
  • 제가 보낸 이메일은 그냥 무시하세요.
    Please disregard the email I sent to you.
  • 나는 그의 비난을 무시해 버렸다.
    I let his criticism roll off my back.
  • 우리는 또 다른 테러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We cannot neglect the possibility of a recurrence of terrorist attacks.
  • 모두가 내 충고를 무시했다.
    My advice fell on everyone's deaf ears.
  • 그녀는 나를 못 본 척 무시했다.
    She looked straight[right] through me.

2. (업신여기다) slight, (formal) disdain, look down on
  • 그가 나를 무시했다.
    He looked down on me.
    He put me down.
  • 무시당하는 기분이다.
    I feel like I'm being slighted [passed over, overlooked].
  • 가진 것 없다고 사람 무시하지 마라.
    Don't look down on [condescend to] people just because they don't have anything.
  • 그는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He is a force to be reckoned with.

일축하다, 묵살하다: 

1. (제안·부탁 등을) refuse [reject, turn down, dismiss] flatly
  • 경영진은 우리의 요구를 일축했다.
    The management flatly rejected our demands.
2. (소문·의혹 등을) dismiss, reject
  • 그는 소문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일축했다.
    He utterly rejected the rumor as nothing even close to the truth.
  • 그의 기량은 사람들의 우려를 일축해 버릴 만큼 뛰어났다.
    His talent was at a level that canceled out everyone's worries.
CF.
  • 나는 우리가 그들의 반대를 묵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I think we can safely dismiss their objections.
  • 이제 더 이상 채식주의자들이 괴짜들이라고 묵살당하지 않는다.
    Vegetarians are no longer dismissed as cranks.
  • 그는 그 여론조사를 무가치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He dismissed the opinion polls as worthless.
  • 그 제안을 일고도 하지 않고 묵살해서는 안 된다.
    The suggestion should not be dismissed out of hand.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발췌: 조영헌] 대운하와 중국 상인(2014)

출처: 조영헌(2014).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민음사.
자료: 구글도서


※ 발췌:


1. 도시 발전과 유동 인구

1.1 수·당 시대의 양주

양주라는 도시가 인상적으로 중국 역사에서 주목된 시기는 수·당대였다. 수·당대에 대운하를 이용한 물자 유통이 활기를 띠면서 양주의 위상도 동반 상승했던 것이다.[주]567 정작 대운하를 개통했던 수나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공사와 고구려 침공 등의 외정으로 말미암아 쇠락했지만,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대운하의 경제적 혜택을 톡톡이 보았다. ( ... ... ) 즉위한 지 14년, 대운하가 완성된 지 8년 만에 수양제는 양주에서 생을 마감하고 수나라의 운명도 끝이 났으니, 수의 생명력이 대운하로 소진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운하 건설로 인해 남과 북 사이의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당대가 되면 대운하를 통해 남북의 경제 교류가 활성화될 뿐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통합을 유지하는 데 공헌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앞서 언급한 피일휴는 대운하에 대해서 "수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그 해로움이 말할 수 없었지만 당나라의 백성들에게는 그 이로움이 말할 수 없다."고 노래했으며, 송대가 되면 대운하는 수도인 개봉으로 곡물을 운송하는 조운 루트로 크게 번영했다. 그사이 강남 물자의 집산지였던 양주는 경제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 ... )


1.2 명·청 시대의 도시 인구

하지만 명조가 개창된 이후 회·양 지역의 경제는 곧 활기를 되찾았다. 지역 사회가 안정을 되찾고 양회 염장에서 생산된 소금이 양주와 회안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했으며, 북경 천도 이후 대운하를 통한 조운이 본격화되자 회·양 지역의 주요 도시는 곧 각지에서 몰려드는 상인, 관리 등 각종 체류자[流寓, sojourner]들로 붐비기 시작했다.[주]573 명초부터 회·양 지역에는 강소성 남부 지역과 강서, 휘주, 산서 등 외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토착인을 수적으로 초과하기 시작했다.[주]574 ( ... ... )


1.3 양주의 도시 구조


1.4 회안의 도시 구조


1.5 도시 발전과 대운하


1.6 유동 인구

  둘째, 회안과 양주의 도시 발전에 유동 인구의 비중과 역할이 높았다. 앞서 인용했던 "사방으로부터 주거와 상고가 모여드는 곳으로, 인구가 이전의 몇 배가 될 정도로 번성했"다는 구절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지만, 이는 양주뿐 아니라 회·양 지역에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1605년에 간행된 『양주부지』를 보면 양주의 토착민이 유동 인구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사치 풍조를 주도한 사람들이 "모두 사방에서 온 상인"으로 "토착인은 열에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주]595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외지에서 이주해 온 유동 인구 가운데 세력가들이 많았음은 틀림없다. 회안 하하진의 경제를 주도한 사람들 역시 바깥에서 들어온 외래 상인이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 ... ... )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Dic: bloody (as emphasizing in a slightly rude way)


[Adj, Adv] used to emphasize an adjective, adverb or noun in a slightly rude way:

  • Life would be bloody boring if nothing ever went wrong.
  • Don't be so bloody stupid.
  • She's done bloody well to reach the semi-final.
  • You must think I'm a bloody fool.
  • I had a bloody good time last night.
  • I'm afraid there's not a bloody thing (= nothing) you can do about it.
  • I can't see a bloody thing (= anything) in here.

CF. used to express anger or to emphasize what you are saying in a slightly rude way:
  • I've had a bloody awful week.
  • It's a bloody disgrace that some war widows don't get a decent pension.
  • Don't be a bloody idiot!
  • This computer's bloody useless! It's always going wrong.
  • Don't you tell me what to do! I'll do what I bloody well like in my own house.

.... CALD

Mirror: 다수결 투표를 민주주의의 기계적 정의로 지나치게 강조하다


"다수결 투표를 민주주의의 기계적 정의로 지나치게 강조하다" ... (X)

"There is too much emphasis on majority voting as the mechanical definition of democracy." ... (Y)

* * * 

그런 대로 읽고 넘어갈 수 있는 문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A를 B라고 여기다' 혹은 'A=B의 관계를 표상하는 무슨 행동을 하다'의 구조:
  • emphasize something(A) as something else(B)
  • regard something(A) as something else(B)
  • perceive something(A) as something else(B)
  • think something(A) as something else(B)
  • ...
등등.

그러나 부정적 의미를 보태는 "mechanical"과 "too much"가 병존함에 따라 (X)와 같이 번역해서는 우리말처럼 읽히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 볼 점들이 몇 가지 있을지도 모르겠다.

....


[발췌:애쓰모글루/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1장, 가깝지만 너무 다른 도시


출처: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2012).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최완규 옮김/장경덕 감수/시공사 펴냄.
기타자료: 구글도서

※ 발췌 (excerpts): pp. 27~

* * *

1장 가깝지만 너무 다른 도시 


1.1 갈라진 도시 (p. 27)

  ( ... ... ) 미국의 제도가 멕시코를 비롯한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보다 경제적 성공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초기 식민지 시대에 각기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에 비롯된 제도적 차이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가 형성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2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건설 (p. 31)

1516년 에스파냐의 항해사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Juan Diaz de Solis는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의 광활한 어귀에 도착했다. 뭍에 오른 데 솔리스는 이곳을 에스파냐의 땅이라 선언하고 이 강에 리오 데라 플라타Rio de la Plata(은의 강)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지 인디오가 온몸을 은으로 치장했기 때문이다. 강어귀 양편에는 서로 다른 원주민들이 살았다. 지금의 우루과이 땅에는 차루아스 이닏오가 살았고 아르헨티나의 영토가 된 팜파스 대초원 지대에는 케란디 인디오가 살았는데, 이들 모두 이방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원주민들은 작은 집단을 이뤄 사냥과 채집 생활을 했으므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중앙정치기구가 없었다. 에스파냐 영토를 넓히려고 새로운 지역을 탐사하던 데 솔리스는 바로 그런 차루아스 인디오 무리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1534년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던 에스파냐는 페도르 데 멘도사Pedro de Mendoza의 지휘하에 1차 정착민을 파견했다. 같은 해 정착민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땅에 도시를 건설했다. 유럽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곳이었을 법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말 자체가 '맑은 공기'를 뜻할 정도로 기후가 쾌적하고 온화했다. 하지만 에스파냐 1차 정착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들이 좇던 것은 맑은 공기가 아니었다.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문제는 차루아스와 케란디 인디오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에스파냐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길 거부했고 강제로 붙잡는다 해도 일을 하지 않았다. 활과 화살로 새 정착촌을 공격하기도 했다. 에스스파냐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제 손으로 직접 음식을 마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들이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원주민에게 강제노동을 시킬 수도 없었고 빼앗을 은이나 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 솔리스가 발견한 은은 사실 서쪽으로 한참 멀리 떨어진 안데스산맥에 자리 잡은 잉카제국에서 온 것이었다.
  In 1534 the Spanish, still optimistic, sent out a first mission of settlers from Spain under the leadership of Pedro de Mendoza. They founded a town on the site of Buenos Aires in the same year. It should have been an ideal place for Europeans. Buenos Aires, literally meaning "good airs," had a hospitable, temperate climate. Yet the first stay of the Spaniards there was short lived. They were not after good airs, but resources to extract and labor to coerce. The Charruas and the Querandi were not obliging, however. They refused to provide food to the Spaniards, and refused to work when caught. They attacked the new settlement with their bows and arrows. The Spaniards grew hungry, since they had not anticipated having to provide food for themselves.  Buenos Aires was not what they had dreamed of. The local people could not be forced into providing labor. The area had no silver or gold to exploit, and the silver that de Solis found had actually come all they way from the Inca state in the Andes, far to the West.

  에스파냐인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도 더 많은 보물과 복속시키기 쉬운 원주민들을 찾아 사방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1537년, 그중 한 원정대를 후안 데 아욜라스가 지휘했다. 이들은 잉카제국으로 향하는 길을 찾기 위해 파라나 강을 따라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과라니 인디오를 만난다. 옥수수와 카사바를 재배하는 농경문화를 영위하며 정착생활을 하는 원주민이었다. ( ... ) 과라니의 저항을 간단히 물리친 데 아욜라스는 지금의 파라과이 수도로 남아 있는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라 아순시온(아순시온 산타 마리아의 성모 마리아)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한다. 데 아욜라스와 그의 부하들은 과라니의 공주들과 결혼해 곧바로 신흥귀족의 지위를 꿰찬다. 기존의 부역 및 조세징수체계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그 고삐를 쥔 격이어서 애초부터 이들이 창설하기를 바란 식민지 형태였다. 그로부터 4년도 안 돼 에스파냐인이 죄다 신도시로 떠나버리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 ... ... ) After a brief conflict, the Spanish overcame Guarani resistance and founded a town, Nuestra Senora de Santa Maria de la Asuncion, which remains the capital of Paraguay today. The conquistadors married the Guarani princesses and quickly set themselves up as a new aristocracy. They adapted the existing systems of forced labor and tribute of Guarani, with themselves at the helm. This was the kind of colony they wanted to set up, and within four years Buenos Aires was abandoned as all the Spaniards who'd settled there moved to the new town.

  '남아메리카의 파리'를 만들고자 팜파스 대초원의 비옥한 농경지대에 터를 닦아 유럽양식의 대로들이 들어선 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다시 정착민이 몰려든 것은 1580년이 돼서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버리고 과라니 인디오를 정복한 사례만 보더라도 당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어떤 식으로 식민지화하고자 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초기 에스파냐인이나 앞으로 살펴볼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역시 제 손에 흙을 묻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군가 대신 땀을 흘리고 금은보화는 자기들이 독차지하길 원했다.


1.3 에스파냐의 식민지 전략 (p. 33)

  데 솔리스, 데 멘도사, 데 아욜라스 이전에도 쟁쟁한 탐험가들이 미대륙을 찾은 바 있었다.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제도의 섬 하나를 발견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에스파냐가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미 대륙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를 침략했다. 15년 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로 원정을 나갔고, 페드로 데 멘도사가 리오 데라 플라타로 향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이후 1세기 동안 에스파냐는 남아메리카 대륙 중부, 서부, 남부 대부분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한편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브라질을 복속시켰다.

  에스파냐의 식민지 전략은 그 효과가 탁월했다. 멕시코에서 코르테스가 완성한 전략이었는데 적대적인 원주민을 굴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디오 지도자를 포로로 잡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전략 덕분에 에스파냐인은 인질로 잡은 지도자의 부를 빼앗고 휘하 토차민으로부터 공물과 식량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원주민 사회에서 신흥귀족 세력으로 입지를 굳혀나갔다. 기존에 시행되던 조세, 공물, 특히 강제노역체제를 고스란히 손에 넣은 것이다. 

  1519년 11월 8일, 코르테스 원정대는 아즈텍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했다. ( ... ) 그 후에 벌어진 일은 1560년대 프란체스코회 수사 베르나르디노 데 사하군이 남긴 유명한 고문헌인 '피렌체 사본'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 ... )

  [①라틴아메리카 이야기] 아즈텍에 대한 군사 정복은 1521년에 마무리되었다. 누에바 에스파냐(뉴스페인)의 총독으로 임명된 코르테스는 가장 값진 자산인 원주민을 이른바 엔코미엔다encomienda라는 제도를 통해 분배하기 시작했다. [②유럽의 스페인 이야기] 에스파냐 남부는 8세기부터 이슬람교도인 무어인이 장악했다. 15세기 들어 에스파냐가 남부 국토회복운동을 벌이면서 공신에게 토지를 분양하기 위해 처음 도입한 제도가 바로 엔코미엔다였다. [③ 라틴아메리카 이야기] 하지만 신세계에서는 과거보다 해악이 훨씬 컸다. 일정수의 인디오와 토지를 엔코멘데로encomendero라 부르는 에스파냐 귀족에게 부여하는 제도로 변질된 것이다. 인디오는 엔코멘데로에게 공물과 노역을 제공해야 했다. 엔코멘데로는 인디오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책무에 대한 대가라는 핑계를 댔다. 
  The military conquest of the Aztecs was completed by 1521. Cortés, as governor of the province of New Spain, then began dividing up the most valuable resource, the indigenous population, through the institution of the ^encomienda^. The ^encomienda^ had first appeared in 15th century Spain as part of the reconquest of the south of the country from the Moors, Arabs who had settled during and after the 8th century. In the New World, it took on a much more pernicious form: it was a grant of indigenous peoples to a Spaniard, known as the ^encomendero^. The indigenous peoples had to give the ^encomendero^ tribute and labor services, in exchange for which the ^encomendero^ was charged with converting them to Christianity.

  엔토미엔다의 정황을 후대에 가장 생생하게 남긴 것은 도미니카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였다. ( ... ) 1542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서인도제도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 ( ... ... )  [니카라과에서의 엔코미엔다:]
정착민은 각자 할당된 도시에 거처를 마련한다(법적으로는 이를 엔코미엔다라 칭한다). 원주민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독차지한다. 대대손손 땀 흘리며 작물을 길러온 원주민의 토지도 빼앗는다. 정착민은 신분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원주민이라면 모조리 자신의 하인으로 삼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부려먹는다.
[오늘날 콜롬비아에 해당하는 뉴그라나다에서의 엔코미엔다: ]
에스파냐인은 장기적으로 마지막 한 줌의 황금까지 모조리 빼앗겠다는 일념으로 으레 그래 왔듯이 도시와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을 나눠 갖는 전략을 폈다(언제나처럼 엔코미엔다를 시행한 것이다)…. 또 늘 그렇듯이 원주민을 하찮은 노예로 취급했다. 원정대를 이끄는 수장은 왕을 사로잡아 예닐곱 달 동안 인질로 삼고 터무니없이 많은 황금과 에메랄드를 요구했다. 보고타의 왕은 겁에 질린 나머지 고문하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집 한 채를 온통 황금으로 채워 넘기라는 요구도 들어주었다. 그러기 위해 왕은 황금을 찾아오라고 원주민을 파견했고, 이들은 각자 손에 얼마간의 보석을 쥐고 돌아왔다. 하지만 ( ... ... )

1.4 미타의 부활 (p. 37)

  멕시코에서 완성된 정복 전략과 제도는 에스파냐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너도나도 모방하기에 바빴다.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된 사례를 들라면 역시 피사로가 페루를 정복할 때였다. ( ... ... )
  • [앞에 피사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지]
  • The strategy and institutions of conquest perfected in Mexico were eagerly adopted elsewhere in the Spanish Empire. Nowhere was this done more effectively than in Pizarro's conquest of Peru. ( ... ... )

  피사로는 페루의 툼베스라는 도시의 인근 해안으로부터 남쪽으로 진군해 나아갔다 1532년 11월 15일, 그는 가하마르카라는 고원도시에 당도했다.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가 진을 치고 있던 곳이었다. [... 스페인 원정대의 만행과 약탈 묘사 ...]

   ( ... ... )

  이 시점에서 에스파냐 원정대는 잉카제국 원주민에 눈독을 들였다. 멕시코에서처럼 잉카제국 사람들은 엔코미엔다로 할당되었다. 피사로를 떠난 정복자들은 저마다 엔코미엔다를 꿰차게 된 것이다. 초기 식민지 시절 엔코미엔다는 노동력을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본 제도로 활용되었지만 뒤이어 강력한 맞수가 등장한다. 1545년 디에고 구알파라는 인디오가 지금의 볼리비아가 있는 안데스산맥 고지대에서 원주민의 사원을 찾고 있었다. 일순 불어 닥친 강풍에 내동댕이쳐진 그의 눈에 은광석 한 무더기가 들어왔다. 엄청난 양의 은맥을 발견한 것이다. 에스파냐 원정대는 이 은광을 '엘 세로 리코(풍요로운 봉우리)'라고 칭송했다. 이 은광을 중심으로 포토시Potosi라는 도시가 번창했다. 절정기였던 1650년대에는 당시 리스본이나 베네치아보다 많은 16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

  ( ... 은광 채굴과 노동력 착취 ... )

  ( ... ... )


1.5 잉글랜드의 북아메리카 식민지화 (p. 43)


1.6 새로운 통치 모형 (p. 49; p. 23)

  The Virginia Company was intended to be a moneymaking enterprise, and after two disastrous years, there was no whiff of profit. ( ... ... )

   ( ... ... )

  에스파냐가 멕시코와 중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성과를 거둔 전략이 북아메리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첫 번째 교훈을 얻는 데 12년이나 걸린 꼴이었다. 이후 17세기 내내 두 번째 교훈을 두고 투쟁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경제적으로 성장 가능한 식민지를 건설하는 유일한 대안은 개척민이 투자를 하고 땀 흘려 일할 의욕이 생길 만한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아메리카를 개척하면서 잉글랜드 지도층은 에스파냐가 그랬던 것처럼 걸핏하면 식민지의 소수 엘리트층을 제외한 나머지 개척민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극도로 제한하는 제도를 수립하려 들었다. 하지만 버지니아 사례에서 보듯 그런 모형은 번번이 무너져 내렸다.

  버지니아 회사의 전략이 수정된 직후 어느 때보다도 야심적인 시도가 있었다. 1632년 잉글랜드 왕 찰스 1세가 체서피크 만 북부의 1,00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볼티모어 경인 세실리우스 캘버트에게 하사한 것이다. 메릴랜드 특허장Charter of Maryland은 볼티모어 경에게 그가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전폭적인 재량권을 부여했다. 헌장 제8조에는 볼키모어 경이 "토지를 하사한 취지에 따라 상기 지방의 탁월하고 만족스러운 통치를 위해 어떤 종류의 법이라도 정하고 만들어 집행할 수 있는 자유롭고 완전한 절대권력을 가진다" 명시되어 있다.
( ... ... ) The Charter of Maryland gave Lord Baltimore complete freedom to create a government along any lines he wished, with clause VII noting that Baltimore had "for the good and happy Government of the said Province, free, full, and absolute Power, by the Tenor of these Present, to Ordain, Make, and Enact Laws, of what Kind soever."
  볼티모어 경은 장원사회를 건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했다. 17세기 잉글랜드 지방을 북아메리카 대륙에 걸맞게 이상적으로 변형한 형태였다. 먼저 토지를 수천 에이커의 대지로 나누고 지주로 하여금 경영하게 했다. 지주는 소작농을 부릴 수 있고, 소작농은 토지를 관장하는 엘리트 계층에 세금을 내는 구조였다. 1663년 후반, 앤서니 애슐리-쿠퍼 경 등 8명의 영주가 캘롤라이나를 건립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애슐리-쿠퍼 경은 잉글랜드의 내로라하는 철학자이자 그의 서기였던 존 로크와 함께 캐롤라이나 기본 헌법Fundamental Constitution of Carolina을 제정했다. 이전에 만들어진 메릴랜드 특허장과 마찬가지로 이 문서 역시 지주 엘리트 계층이 장악하는 엘리트 위주의 계급 사회 건설을 위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군주제하에서 살고 있으니 이 지역 역시 군주국의 일부다. 따라서 이 지역 정부는 그런 군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형태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다수가 참여하는 민주제 설립을 피해야 한다."
Baltimore drew up a detailed plan for creating a manorial society, a North American variant of an idealized version of 17th-century rural England. It entailed dividing the land into plots of thousands of acres, which would be run by lords. The lords would recruit tenants, who would work the lands and pay rents to the privileged elite controlling the land. Another similar attempt was made later in 1663, with the founding of Carolina by 8 proprietors, including Sir Anthony Ashley-Cooper. Ashley-Cooper, along with his secretary, the great English philosopher John Locke, formulated the Fundamental Constitutions of Carolina. This document, like the Charter of Maryland before it, provided a blueprint for an elitist, hierarchical society based on control by a landed elite. The preamble noted that "the government of this province may be made most agreeable to the monarchy under which we live and of which this province is a part; and that we may avoid erecting a numerous democracy."
  ( ... ... )

  버지니아에서 가혹한 규칙을 강제 시행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듯이 메릴랜드캐롤라이나에서도 같은 형식의 제도를 만들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실패 원인도 비슷했다. 세 가지 사례 모두 정착민을 엄격한 계층 사회에 예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입증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세계에서는 정착민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수두룩했다. 따라서 규제를 가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일할 의욕이 생기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했다. 머지않아 이들은 더 많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메랠랜드 정착민 곧 자기들만의 토지를 달라고 요구했고 볼티모어 경은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의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1691년 메릴랜드 의회는 국왕을 설득해 메릴랜드를 왕실 직할 식민지로 선포하게 했다. 볼티모어 경이 이끄는 지주의 정치적 특혜를 없애버린 것이다. 캐롤라이나에서도 이와 유사한 투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이번에도 두 손을 든 것은 지주들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역시 1729년 잉글랜드 왕의 직할 식민지로 거듭난 것이다.
Just as the attempt to impose draconian rule in Virginia failed, so did the plans for the same type of institutions in Maryland and Carolina. The reasons were similar. In all cases it proved to be impossible to force settlers into a rigid hierarchical society, because there were simply too many options open to them in the New World. Instead, they had to be provided with incentives for them to want to work. And soon they were demanding more economic freedom and further political rights. In Maryland, too, settlers insisted on getting their own land, and they forced Lord Baltimore into creating an assembly. In 1691 the assembly induced the king to declare Maryland a Crown colony, thus removing the political privileges of Baltimore and his great lords. A similar protracted struggle took place in the Carolinas, again with the proprietors losing. South Carolina became a royal colony in 1729.

  1720년대 들어서는 앞으로 미합중국이 될 13개 식민지 모두 비슷한 통치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같이 총독 한 명과 유산계급 남성만 참여하는 의회로 구성되었다. ( ... ... ) 바로 이런 의회와 그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것이 미합중국 독립의 전신이라 할 만한 1774년 제1차 대륙의회First Continental Congress였다. 이들 의회는 구성원을 결정할 권리와 과세에 대한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모두 알다시피, 잉글랜드 식민정부로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By the 1720s, all, all the 13 colonies of what was to become the United States had similar structures of government. In all cases there was a governor, and an assembly based on a franchise of male property holders. ( ... ... ) The assemblies believed they had the right to determine both their own membership and the right to taxation. This, as we know, created problems for the English colonial government.

1.7 미국 헌법 vs. 멕시코 헌법 (p. 55)


1.8 아이디어와 특허제도  (p.61)


1.9 경로 의존성의 산물  (p. 66)


1.10 다른 길을 걸은 두 억만장자  (p. 69)


1.11 세계 불평등 이론을 제기하며  (p. 72)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Dic / Usage: confirm with the idea ...



In fact, very few educationalists would not confirm with the idea that technology has radically altered the education and learning procedure.  (Link)


May ALLAH forgive these developers but how does this confirm with the idea of equality of people under Islam and specially in Loly Makka?  (Link)


... of biotic interactions, and that this would confirm with the idea that one important advantage of sexual reproduction is that it enhances the  ... (Link)


In Florida law, carelessness is confirmed with the idea of "proper search," which is generally the liability of the car owner to be aware of the street, other vehicles, ... (Link)


This finding confirmed with the idea of Chung and Nation. (Link)


Regardless of whether one confirms with the idea of dark feminism, or feminism in any way for that matter, it might be advantageous to understand about the ... (Link)





2015년 5월 22일 금요일

[자료 및 메모] 영국의 권리청원(1628)과 권리장전(1689) 배경


자료 1: English Bill of Rights 1689

자료 2: 알 수 없는 출처의 한글문서 

※ 발췌: 권리장정의 내용은 통치자는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거나 군대를 보유하지 못한다.  통치자는 법 집행을 미루거나 의회의 권리에 간섭하지 못한다.  통치자는 영국 국교회를 지지한다.  의회 내에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  국민은 청원권을 가지며 과도한 벌금 부과, 보석금  및 잔인한 처벌을 받지 아니한다.  의회의 회기는 자주 열린다.  등등.

자료 3: [블로그-바람의 언덕] 영국 명예혁명과 권리장전

자료 4: 임영태(2014). [구글도서] 돋보기 근현대사4: 영국 혁명. 북이십일.
자료 5: 임영태(2014). [구글도서] 스토리 세계사6: 근대편 I. 북이십일.

※ 발췌: 4장_ 귀족과 젠트리의 타협으로 이룬 조용한 혁명

_ 신흥 젠트리의 성장: 찰스 1세의 군대는 군비도 없었고, 충성심도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군대는 잉글랜드 각지를 점령하고 신앙의 자유와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달리 방법이 없게 된 찰스 1세는 결국 스코틀랜드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국왕은 다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상원이 국왕에게 의회를 소집하도록 권고했고, 1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국왕은 의회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1640년 1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런데 의회에는 젠트리로 불리는 지방 소귀족과 지주들이 크게 진출해 있었다. 의회 총 의원 547명 가운데 약 60%인 333명이 젠트리였고, 74명이 법률가, 55명이 상공업자였다. 젠트리는 절대 왕정이 확립되면서 몰락한 귀족들의 틈새를 메우고 나선 신흥 지주들로서, 사회적 신분으로 보자면 자영 농민인 요명yeoman보다는 위에 있었고 작위를 가진 귀족보다는 아래에 있었다. 일종의 중간 계급에서 신흥 시민 계급(부르주아지)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 사이에 대략 3배 정도로 늘어났다. 그 기간에 영국의 인구가 약 2배로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이들의 비중이 매우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이들은 하원 의석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의 핵심인 치안 판사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_ 장기 의회의 개회: 젠트리와 더불어 이 시기에 크게 성장한 신흥 계급으로는 법률가, 의사와 같은 전문 직업인들과 런던과 지방의 상인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 ... ) 신흥 계급 가운데는 칼뱅 계열의 청교도가 많았는데 이들의 영향을 받아 수공업자, 소상인, 자영 농민들 사이에도 청교도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특히 젠트리들은 도시으 소시민층에 청교(淸敎)와 문자 해독, 교육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을 정치 세력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cf. 청교도: 퓨리턴. 성공회의 가톨릭적 요소를 말끔히 제거하자고 주장한 영국의 국교도들.
cf. 청교(淸敎): 자신의 교의를 절대적인 한계 내로 정화하려는 종교 운동.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젠트리가 대다수를 차지한 채 열린 1640년 11월의 의회는 그 후 13년 동안 해산되지 않았다. 이 의회를 '장기 의회(The Long Parliament)'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에 젠트리가 이끄는 청교도 혁명이 진행되었다.  ( ... ... )


03_ 올리버 크롬웰의 등장

03.1_ 런던 시민 봉기와 왕의 굴복: 의회가 열리자 의원들은 한결같이 찰스 1세의 횡포를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한목소리로 그동안 전횡을 휘둘러 온 왕의 측근 윌리엄 로드와 스트래퍼트 백작을 처벌하라고 아우성쳤다. 런던 시민이 들고 일어나면서 폭동으로 발전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였고, 마침내 스트래퍼트 백작은 수만 명의 런던 시민이 환호하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 ... ... ) 1641년 2월~8월 사이 의회는 절대 왕정의 전회을 막을 새로운 법률들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 ... ... ) 그리고 크롬웰이 주동이 되어 '대항의문The Grand Romanstrance(1641.12.1.)을 제출하면서 의회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03.2_ 왕당파와 의회파의 분열: ( ... ... ) 1642년 8월, 드디어 제1차 영국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03.3_ 의회군과 국왕군의 내전: ( ... ) 1642년부터 2년 동안 의회군은 패하기만 했다. ( ... )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국왕은 스코틀랜드로 피신했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를 잡아 1646년 5월, 40만 파운드를 받고 의회군에 팔아넘겼다. 이로써 4년에 걸친 제1차 내전은 끝났다.

03.4_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다: ( ... ) 국교회 체제를 무너뜨린 의회는 왕과 국교회가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고 상층 지주들과 부유한 상공업자들에게 팔아치웠다. 상층 젠트리들은 더욱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부유한 상공업자들도 헐값에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의회의 주도권을 상층 젠트리와 부유한 상공업자들로 기반이 된 장로파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의회의 독립파와 독립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군대는 반발했다. ( ... )  1647년 5월, 의회는 군대 해산을 결의했다. 클롬웰은 멀뚱히 앉아서 군대 해산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 ... ) 독립파 내에는 소농민, 소작인, 수공업자, 소상인을 기반으로 철저한 민주주의와 평등을 주장하는 이른바 수평파(Diggers 또는 Levellers)가 있었다. ( ... ) 의회의 굴복과 군대 해산의 저지. ( ... ) 1648년 2월 찰스 1세, 잉글랜드 장로파 등과 밀약을 맺은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로 쳐들어왔다. 제2차 내전의 시작. ( ... )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 처형. 이로써 영국의 절대 왕정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크롬웰 사후 한때 왕정이 복고되기는 하지만, 이때의 왕정은 결코 찰스 1세와 그 이전 국왕이 누렸던 절대주의 왕권은 아니었다. 크롬웰이 이끈 일련의 사태를 역사에서는 '청교도 혁명'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국 혁명의 제1막이라 할 수 있다.

( ... ... )

2015년 5월 21일 목요일

[애쓰모글루 &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한국어판 서문

출처: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2012).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원제: 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


저자들의 한국어판 서문의 제목:

"무엇이 남북한의 운명을 갈랐을까"

※ 발췌:

( ... ... ) 남한에서는 경제적 삶을 지배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규칙인 경제제도가 국민의 저축과 투자, 혁신을 보상해 준 반면,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양측 모두 중앙집권화의 역사를 통해 성장이 가능했지만, 원래 그런 권력이란 좋게도 쓰이지만 나쁘게도 쓰이는 법이다. 남한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 ... ... )

( ... ... ) 물론 가난한 나라라고 해서 죄다 공산주의 체제를 따르는 것은 아니며, 언뜻 보기와 달리 북한이 가난한 것도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 ... ... )


[자료: 한정희]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자본화 과정”연구 (2015)


지은이: 한정희 (대구대학교 부동산학과)
자료: http://www.reacademy.org/rboard/data/krea2_new/60_10.pdf
시기: 2015년 2월

....

[강의 자료] Why Nations Fail

자료 1: James Robinson, https://www.youtube.com/watch?t=263&v=OpKKzp6NcWg ( 2013. 1. 25. )




자료 2: Daron Acemoglu, ... 

 



CF. http://hsalbert.blogspot.kr/2015/01/acemoglu-robinsons-why-nations-fail.html
CF. http://hsalbert.blogspot.kr/2015/01/some-links-about-inclusive-institutions.html
CF. http://www.yes24.com/24/goods/7745135?art_bl=7916471



2015년 5월 15일 금요일

[발췌: D. Abulafia's] The Great Sea: A Human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출처: David Abulafia (2011). The Great Sea: A Human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Oxford University Press.
자료: 구글도서



※ 발췌 (excerpt): pp. 275~

THE THIRD MEDITERRANEAN, 600-1350

III


One reason the Pisans and Genoese were able to launch their own fleets was the collapse of central authority in northern Italy. The 'kingdom of Italy' had little more than a notional existence, and its ruler was, since the tenth century, the German king, who was also entitled to claim the crown of the western Roman Empire, revived in 962 with the papal coronation of Otto I. The power of the local imperial viscounts withered; the day-do-day government of these and other towns fell into the hands of the local patricians. By the beginning of the 12th century they began to organize themselves into self-governing communities─historians use the terms 'commune' and 'city-republic', but they adopted a variety of terms including, in Genoa, 'company' (^compagna^), which literally meant 'those who break bread(^pane^) together'. Indeed, the government of Genoa after 1100 was very like the management of a business partnership. The ^compagna^ was formed for a limited period of a few years, to resolve a specific problem such as the building of a crusade fleet, or political tensions that, in Genoa, sometimes resulted in assassinations and street-fighting. The commune was in some respects a public institution, embracing the whole community, but in other very important respects it was a private league, though the distinction between 'public' and 'private' was not clear in the minds of twelfth-century Genoese. The city was littered with private enclaves, the property of monasteries and nobles, little pieces of exempt territory that were only very gradually brought under the control of the presiding officers of the ^compagna^. These officers took the resounding title of 'consul', proving an awareness of the Roman republic model, though there were as many as six consuls when the first ^compagna^ came into being.[n.7] As in ancient Rome, the system of election was carefully manipulated by those with real power, and in this period they were always drawn from the patrician class.[n.8]

  These patricians created the trading empire of Genoa, and similar development occurred in Pisa. ( ... ... )

[발췌: S.A. Epstein's] Essays on Medieval Genoa


출처: Web page on Medieval Genoa written by Professor Stephen A. Epstein of the History Department of 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 and Professor George L. Gorse of the Art History Department of Pomona College, Claremont, CA.

차례: http://www.pages.pomona.edu/~glg04747/genoa/index.htm
자료: History & Municipal Institutions


※ 발췌 (excerpt):

( ... ) A charter of 1056 reveals that the Genoese enjoyed a generous measure of self-rule, but the city’s actual governing institutions remained unknown, until the medieval commune emerged in 1099. In that year, the historian Caffaro informs us, a compagna, or sworn association of citizens, was established, and six consuls from the neighborhoods constituted the commune’s executive.  ( ... )

In the twelfth century the Genoese continued to administer their city through a board of consuls, usually a mix of nobles and prosperous merchants. The consul’s job was to foster Genoese trade overseas by securing commercial privileges and occasionally by fighting the Pisans, Genoa’s main rival in this period. ( ... )

[발췌: L. Marines's] Power And Imagination: City-states in Renaissance Italy (2013)


출처: Lauro Martines (2013). Power And Imagination: City-states in Renaissance Italy.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자료: 구글도서



※ 발췌: 

CHAPTER 1

THE ASCENT OF COMMUNES


1.1 Background 


1.2 Communes Emerge

We have seen that the peninsula had several sovereignties─royal, papal, Byzantine, and independent. Only one, however, offered the environment for city-states, the feudal kingdom of upper Italy: land of bellicose cities, communes, and astonishing urban energies. Royal authority here, in accord with the nature of feudal kingship, was divided among a number of parts, specifically seven marquisates at the beginning of the 11th century. But the marguisates were themselves subdivided into counties, and it was at the county level, or at the level of even lesser feuds (e.g., the ^pieve^ and castle), that powers was effectively exercised. The countryside around Pisa, for example, was under the immediate rule of a hereditary viscount, supposedly the representative of an overload based in Lucca, the marquis of Tuscany. This dignitary was, in his turn, a royal-imperial official, holding the marquisate as a fief from the crown of the Italic kingdom. In fact, keeping with feudal realities, the authority of the marquis was far from complete, for after 1052 the bishops of Arezo and Volterra held the preponderance of temporal authority in these Tuscan cities. And the viscount of Pisa independently managed his own affairs, while also claiming (as ^gastaldo^) some authority directly from the crown and having to share still other jurisdictions with the powerful archbishop of Pisa.

  There was no necessary coordination, no shaping policy, and only a phantom central administration linking together the different parts of the kingdom. Real authority was local authority, wielded by one or several lords: marquis, bishop, count, viscount, abbot, ^gastaldo^, or captain. Once these had been weakened or elbowed aside, the political history of the Italy of the German kings became the history of cities driving aggressively out beyond their horizons.

  The starting point in the city's territorial expansion was the diocese, the major unit of church administration, headed by a bishop. ( ... ... )



CHAPTER 2

THE EARLY COMMUNE AND ITS NOBILITY


2.1 COMMUNE AND EMPIRE  (p.22)

Communes were fairly synonymous with self-government, but around the year 1100 self-government was realized by seizing it. The early commune bristled with weapons. It members looked to the defense of the city and its walls; they engaged in mounted combat or naval warfare; and while they were committed to keeping the peace, they were also sworn to help in the repelling of all threats to the existence or powers of the commune. Born in a climate of revolutionary change, whether with the aid of the bishop or against him, the commune straightway made enemies: the bishop or archbishop, counts or viscounts, the Pataria, feudal magnates in the outlying districts, neighboring cities or rival powers, marquis, pope, or emperor.

  From the earliest times, the intensity of local patriotism was amazingly strong. Pavia, the old capital of the Italic kingdom, never forgave Milan, some 20 or 25 miles away, for its dramatic rise and importance on the Lombard Plain. As early as 1058 the two went to war over the question of Pavia's claims to jurisdictions in Milan. No sooner were  communes established than they looked out suspiciously and jealously on their strongest or nearest urban neighbors. Suddenly they were implacable rivals, and open warfare soon broke out. The battled for the control of roads and riverways, tolls and customs, seaways and traffic, and for the right to monopolize commerce in certain goods.

  Pisa and Genoa quarreled bitterly not long after 1016, and war raged between them almost continuously between 1067 and 1085; the hostilities would persist down to the 14th century.  ( ... ) In 1107 Milan and Tortona were allies in wars against Pavia, Cremona, and Lodi. ( ... )

  The major cities and even the little towns that started out as hardly more than castles (e.g., Prato) were social whirlpools, drawing in large numbers of immigrants from the rural sea around. Conversely, too, the economic interests and vitalities of the urban cluster spilled out into the deep countryside: ^cittadini^(citi folk) acquired more and more land, bought up feudal rights, and toiled to evade feudal claims. Propertied rustics and country knights, while holding on to their rural properties, often moved into the city and joined their interests with those of ^cittadini^. The authority of the urban commune thus spead out through the expanding property interests and commercial ties of its citizens, flowing ever more deeply into the countryside and overwhelming resistance there, whether from rural communes or feudal magnates.

  The "consular commune" was the commune in its first stage of development, so called because it was governed by officials known as "consuls." And if consular leadership was often unsure of its political authority, such uncertainty was also felt in the rural parishes, all the more so as the power of the empire evaporated, as feudal magnates were challenged, and as cities increased their intimidating pressures. In these circumstances the strong carried the day might was right. ( ... ... )


2.2 CONSULAR INSTITUTIONS (p. 26)

The consular commune's battle for public rights went hand in hand with the rise within the city of increasingly complex institutions. Here, much more than in the struggle with the empire, we can begin to make out the intensity and richness of the spreading urban experience the variety of social groups, the political wizardry of emerging elites and transient pressure groups, and the imagination of ambitious men driven by worldly hopes, yet checked and divided, sometimes more and sometimes less, by some regard for the law. They wanted to respect the law, but their engulfing needs and desires often carried them outside it. One result was the emergence of a new body of public and private law.

  ( ... ... )

  The commune was an association of men bound together by an oath and common interests. They swore to aid and defend one another; they pooled their prestige and minute jurisdictions, if they had any; and they invested their consuls, the official heads of the association, with executive and judicial powers. The associates─that is, the members of the commune─swore to obey and follow the consuls, who in turn swore to defend and uphold the association in all its rights and interests.

  The oldest communal institution was the general assembly of all the members of the commune. ( ... ) During the first generation or so of the commune's existence, the general assembly was quite likely convened with some regularity, and in times of trouble even more often. Here the views of leading men were heard and important decisions taken, usually by acclamation. ( ... )

   ( ... ... )

   The consulate, the assembled body of consuls, was the commune's highest executive and judicial magistracy. All important daily matters were discussed and decided here. Having sounded out the general assembly, the consuls made war and piece, led the communal armies, were responsible for the defense of the city, levied taxes, sired legislation, and served as the final appellate court. The consulate was the focus of power in the early commune: it was always coveted, always prized by the ambitious. ( ... ... )

[발췌: S.A. Epstein's] Genoa and Genoese, 958-1528

출처: Steven A. Epstein (2001). Genoa and the Genoese, 958-1528.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자료: 구글도서


※ 발췌: pp. 9~


Chapter 1

 FROM PRACTICALLY NOTHING TO SOMETHING, 958-1154


At the beginning there was the land and the sea, and whatever Genoa was to become, it would owe to its position on the shore at a spot where systems of transport must change. With the northwestern stretch of the Apennines descending steeply to the sea, the most remarkable feature of the land is how little flat space exists (see Map2). Stunning rugged cliffs and rocky beaches have entranced generations of travels to the Rivieras─the Levante to the east and the Ponente to the west. It was never easy to live off poor mountain soils with the few flat areas revealingly named islands, places of refuge in a sea of stone. These mountains have a narrow watershed facing to the sea; to the north, east, and west, what water there was tended to find its way into the great Po valley to the north. Torrents or creeks, the Bisagno to the east of Genoa and to the west the Plocevera, were unnaviguable and were not always reliable sources of fresh water. Genoa was at the mouth of nothing on a sea where some of the great ports sat; there, significant rivers like the Po, Rhone, Arno, and Nile offered access to a hinterland. Beyond the Giovi, the local pass at 472 meters (1,548 feet) through the mountains, the Genoese could reach the upper Po valley and Piedmont, but usually by mules on tough mountain trails or by the admirable Roman Via Postumia, which branched off from coastal Via Aurelia at Genoa and found its way to Tortona, Piacenza, and beyond.[n.1]


1.1 THE ENVIRONMENT  (p. 10)

The natural world, with its opportunities for transport, shaped the ways in which Genoese entered the rest of the Mediterranean world.[n.2] What did nature and the Romans leave them? Nature supplied a mountain city on the sea, a fair port on a harsh coast, probably the best port between Barcelona and La Spezia, though the Genoese were always improving the harbor, making it increasingly artificial one requiring upkeep. Genoa's advantages as a harbor derive from its northern displacement. Although the way to the interior from Genoa through the Giovi pass and the Scrivia valley is not easy, it is at least shorter and so Genoa is the natural port of the upper Po valley. Some flat land around Genoa provided food, at least as important as the shelter its harbor gave ships. ( ... ... )


1.2 ANCIENT AND EARLY MEDIEVAL LEGACIES  (p. 12)


1.3 THE FIRST CRUSADE AND ITS AFTERMATH  (p. 28)

( ... ) In this case, however, the first great chronicler of Genoese history, the nobleman, ambassador, and public official Caffaro, sailed with the great fleet of 1100 that arrived too late to participate in the siege of Jerusalem. But Caffaro was an eyewithnes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Latin kingdom in this critical year, and he is neglected both as a historian of the Crusade and as one of the first urban historians in Europe.[n.64]  Caffaro, born about 1080, lived to the ripe age of 86, only abandoning his greatest work, his chronicle of Genoa, in 1164 because he could no longer continue.[n.65]  Caffaro's own annals cover the period 1099-1163; he also wrote a separate work, a "Brief History of the Kingdom of Jerusalem." As Richard Face noted, Caffaro stands at the beginning of a marvelous traditin of urban history in Genoa, primarily secular in tone and origin, that stretches into the 15th century.[n.66]  From now on we will nearly always have a contemporary or nearly so version of events. Caffaro tends to see the world through patriotic Genoese eyes, but our interest, again, is to see the Genoese through his eyes.

  ( ... ... )


1.3 THE COMMUNE  (p. 33)  

  Caffaro states that a year and a half before the fleet that took Caesarea sailed, the Genoese established a ^compagna^ (commune or sworn association of citizens) to last for three years under the leadership of six consuls. [n.86]  As the fleet departed in August 1100, the Genoese must have set up their compagna early in 1099, perhaps on 2 February, the feast of the Purification of the Virgin, a date that became the traditional first day in office of the Genoese conculs. All earlier documents suggesting that a commune existed in Genoa before 1099 have been dismissed as forgeries, yet the city must have had some form of government in the late 11th century.[n.87]  Caffaro is so matter-of-fact about this compagna that it is impossible to believe that it was the first one. ( ... ) 

  In the aftermath of this discord, sometime between 1087 and 1099, the compagna first appeared in Genoa. Vito Vitale believed that the compagna was a voluntary association of neighborhoods, with the bishop and the nobility joining in the oath.[n.90]  The neighborhoods of Genoa, themselves called compagne, were originally seven: Borgo, Soziglia, Porta, San Lorenzo, Maccagnani, Piazzalunga, and Castello. The neighborhoods had some economic and political organization─all but San Lorenzo had access to the port─and naval obligatioons to provide crews. Arranged much like slices of a cake, Genoa's neighborhoods descended from the hills down to the sea.[n.91]  Vitale suggested that the compagna was a precommunal stage of self-government because of its federal nature, but it is more accurate to consider it as the first stage in the long evolution of Genoa's commune. This period, down to 1191, witnessed periodic renewals and changes in the structure of the sworn association, but gradually its temporary nature disappeared and the number of consuls fluctuated between four and eight. Their means of selection is not clear, but some form of election is probable. Nobles frequently served as consuls and the bishop remained a force, especially in the first half of the century. Everywhere in central and northern Italy, city-states were emerging with a bewildering array of styles of government. The most important of these cities─Venice, Florence, Pisa, Milan, and Genoa─developed in distinctive ways. Giovanni Tabacco believed that the common themes in the struggle for control were how power became institutionalized and how "hegemonic social classes" emerged in Italian urban society.[n.92]  The sworn compagna compelled the Genoese to submit to a common power whose principal mission was to defend the people and to find the means to pay for it. Crusading required so much expenses and effort that it Genoa's case the problems of launching those expeditions probably contributed to the rise of institutions like the compagna. Hegemonic social classes are more difficult to identify, but we should keep an eye on the nobles and the families that dominated the consulate.

  After the first known consuls, the compagna was reestablished in 1102 with four consuls chosen to serve for four years. This process was repeated in 1106 and then regularly in four- or two-year intervals until 1122, when the consuls began to serve one-year terms.[n.93]  Caffaro himself served as consuls in 1122 and five more times down to 1149.[n.94]  Because no autobiographical details survive about these early consuls except from Caffaro, his age, about 42, may or may not have been typical of the men who served for the first time. Various documents from the early 12th century reveal in a piecemeal manner the activities of these consuls. But from about 1143 a remarkable document survives, the brief of the consuls.[n.95]  In part this brief was a précis of the laws of Genoa, and in part it described the office of consul so that the men occupying it knew what to do in the unlikely event that they could all read the brief's Latin. Early briefs probably existed and a later one survives, but this one illuminates the early commune in striking detail.

  First and foremost, the consuls were not to diminish the honor of the city or the church's income and honor. It was something new in medieval Europe that a city could have honor. The consuls were also supposed to dispense equal justice to the citizens, and in peacetime one of their most arduous tasks was to serve as a judge.[n.96]  By 1143, by means of a process to be described shortly, their writ ran from Monaco in the west to Portovenere in the east and in the interior on a line from Voltaggio to Montalto to Savignone─more or less modern Liguria, though plenty of people in the region still vigorously disputed the commune's authority. In Genoa the consuls exercised their offices at three major churches: Santa Maria di Castello, in the heart of the old city; San Siro, the old cathedral; and San Lorenzo, the new seat of the archbiship.[n.97]  Intentional homicide was the first and the most serious crime, the brief explained to the consuls.[n.98]  If the guilty party was not a sworn member of the campagna, or if he was a cleric or a minor, the penalty for homicide was exile and seizure of all goods, which went to the nearest surviving relatives of the victim or, if they refused it, to San Lorenzo. Sons and daughters of the killers could not inherit anything, except of course if the wife killed her husband or the husband murdered his wife. Then the childen, being, however ironically, the nearest surviving kin of the victim, were allowed to inherit. In no case did the consuls have the burden of imposing capital punishment; this was a humane side to Genoese law. In murder cases for which the guilty party was not obvious or easily identified, an accused had the right to defend himself literally by combat against the deceased's champion. If he refused to fight he was guilty, and if he died in the combat he was guilty; in both these instances he also forfeited all of his property. If the accused won the fight, then he merely suffered exile. In this system of law, to be accused was a taint that never completely washed clean.

  Next the brief instructed the consuls on just what it meant to enter into the compagna and what the principal rights of members were.[n.99]  If any Genoese was called to enter the compagna, he had forty days to comply, and if he did not, he was refused to admission for three years.[n.100]  If a person was not in the compagna he could not serve as a consul or treasurer, or be a legate or advocate or serve in any office. Perhaps most importantly, he and his money could not be carried by sea from Genoa, and anyone who transported such a perso and his goods would be held accountable by the consuls. Anyone who did not enter the compagna and had a dispute with a person in it was not allowed to receive any counsel or help from a member. Clearly, those in the compagna were only a subset of the larger pool of adult Genoese men, and only those of a certain local importance found themselves invited to join. Membership probably conferred on people the right to vote for consuls and certainly the right to engage in maritime commerce, the backbone of Genoese prosperity and the source of the great fortunes in the city. Success in trade enabled powerful families to keep together their allies for political as well as economic purposes. By trading or employing those outside their circle, the members of the compagna created wider support for their policies.[n.101]  The poor lived without these benefits, but even ordinary Genoese from time to time risked a few lire in an overseas trading contract. This provision in the brief suggests that many adult men in the city were in the compagna, which also helped members in their lawsuits and disputes. People outside the club were not going to fare well in court cases against members. The brief does not address the question of women and whether or not they entered the compagna. Because no women served in any offices, it is probable that they did not enter the compagna, but as relatives of members they were permitted to engage in trade.

  ( ... ... )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Dic: go on something (as meaning 'use as proof')


  • But you have to go on the facts.
  • There's not much to go on.
  • The police don't have much to go on.
  • Police haven't much to go on in their hunt for the killer.
  • Since there were no witnesses, the police had little to go on.

* * *

△If you talk about the information you have to go on, you mean the information you have available to base an opinion or judgment on.

△(used in negative sentences and questions) to base an opinion or a judgement on something.

△[use as proof] to base an opinion or judgment on something.

△to base an opinion or decision on something.

..... COBUILD, OALD, LDOCE, Macmillan


CF. go on something
  1. (Lit.) to begin something, such as a diet, rampage, drunk, etc. I went on a diet for the second time this month. Fred went on a rampage and broke a window.
  2. (Fig.) to start acting on some information. We can't go on this! We need more information before we can act on this matter! Can you please give us more information to go on?
.... McGraw-Hill Dictionary of American Idioms and Phrasal Verbs


△ To base one's judgment on something; go by something:
  • Going on the few symptoms that we could observe, we were able to diagnose the patient. 
  • Without a witness, the police had nothing to go on.
.....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Phrasal Verbs


2015년 5월 10일 일요일

Dic: [countable] cause (as an aim or principle)


1. 
[Countable] A cause is an aim or principle which a group of people supports or is fighting for. cf. lost cause.
[Countable] an organization or idea that people support or fight for.

  • Refusing to have one leader has not helped the cause. 
  • Animal welfare campaigners raised £70000 for their cause last year.
  • a good cause (=an organization that does good work, such as charity)
  • fighting for the Republic cause.
  • The donation is the biggest private gift to a humanitarian cause.
..... COBUILD, OALD

2.
cause
  • (3) the ideals, etc... of a group or movement: ex) the Communist cause
  • (4) the welfare or interests of a person or group in a dispute: ex) they fought for the miners' cause
  • (5) a matter of widespread concern or importance: ex) the cause of public health

.... COLLINS
3.
have(make) common cause:

  • to join with (a person, group, etc.) for a common objective.
  • to join with other people or groups in order to oppose an enemy .

...  COLLINS, LDOCE

* * *

CF. [Uncountable: N for n, N to-inf] cause: If you have cause for a particular feeling or action, you have good reasons for feeling it or doing it.
  • Only a few people can find any cause for celebration...
  • Both had much cause to be grateful for the secretiveness of government in Britain.

CF.
  • White wrote his draft at a bad moment for the Allied cause.
    (화이트의 초안은 연합국들이 뜻을 모으기에는 좋지 않은 시점에 나왔다.)
    (...)
  • ...


[세계은행 협정] 제4조 제10절 정치활동의 금지




* * *

Article IV: Operations
제4조  업무

SECTION 10. Political Activity Prohibited
제10절 정치활동의 금지


The Bank and its officers shall not interfere in the political affairs of any member; nor shall they be influenced in their decisions by the political character of the member or members concerned. Only economic considerations shall be relevant to their decisions, and these considerations shall be weighed impartially in order to achieve the purposes stated in Article I.

본 은행과 그 직원은 어떠한 회원국의 정치문제에도 관여할 수 없다. 본 은행의 결정은 1개 또는 이상의 관계회원국의 정치적 성격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경제적 사정만이 본 은행의 결정에 대하여 관련성을 가지며, 제1조에 규정된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이러한 경제적 사정은 공평하게 참작된다.


[발췌: J. Hart's] Empire of Ideas: The Origins of Public Diplomacy and the Transformation of U. S. Foreign Policy (2013)

출처: Justin Hart (2013). ^Empire of Ideas: The Origins of Public Diplomacy and the Transformation of U. S. Foreign Policy^. Oxford University Press
자료: 구글도서



※ 발췌 (excerpt): pp. 15 ~

* * *

Chapter 1
"Down with Imperialism"
The Latin American Origins of U.S. Cultural Diplomacy


December 1, 1936 was a cloudless, sunny day in Buenos Aires. The vibrant, mauve flowers of the jacaranda trees had just begun to flower. Thousands lined the streets that beautiful day, taking advantage o the weather and the national holiday the Argentine government had declared in honor of the opening of the Buenos Aires Conference. As the motorcade slowly would its way downtown, U.S. President Franklin Roosevelt and his Argentine counterpart, Augustin Justo, waved to the jubilant crowd. Roosevelt had arrived the day before, after an exhausting two-week, 6,000 mile voyage aboard the cruiser ^Indianapolis^. His appearance, to give the keynote address to the conference, marked the first official visit by a U.S. president to South America.[n.1]

  As the limousine approached the magisterial while marble palace of the Argentinean legislature─the building resembles the Capitol in Washington,' gushed the front-page coverage in the ^New York Times^ ... but "on a smaller scale"─FDR gathered his thoughts. Aided by the arm of his son James, Roosevelt entered the hall and hobbled to the podium in the massive Chamber of Deputies. He received a standing ovation that lasted several minutes. As the crowd quieted down, eager for Roosevelt to begin, a voice bellowed from near the back of the hall: "Down with imperialism!" FDR paused as police removed the heckler, then proceed with his speech.[n.2]

  Nearly a year earlier, when Roosevelt first proposed this gathering of what U.S. officials liked to call the "American republics," the president had emphasized hemispheric affairs. Eleven months later, his focus had changed. A shocking series of incidents around the globe led him to recast his original agenda within an international context. As FDR's Secretary of State Cordell Hull later recalled: " Japan had won a war in China, Italy in Ethiopia; Spain, the mother country of most of the Latin American Republics, was in civil war, with Italy, Russia, and Germany intervening; Germany and Japan were linked in a virtual alliance; Hitler was violating one treaty after another; Britain and France were vacillating; the League was limping toward its end; and the United States was set in a concrete mold of isolation." [n.3]

  Having to balance his instinctive call to action with his nation's hostility to involvement in European affairs, Roosevelt began cautiously. He spoke of "events elsewhere" that "have served only to strengthen our horror of war." Gradually, he grew more assertive, suggesting vaguely that "the Republics of the New World" do something to help the "Old World to avert the catastrophe which impends." The longer he spoke, the more forceful he became. By the end, FDR had made an eloquent appeal for the international agenda his administration had tried to pursue, with limited success and great resistance, for most of the past four years. He concluded with a comprehensive accounting of the relationship between democratic forms of government, the free exchange of commerce, greater security, and "a wider distribution of culture, of education, of thought, and of free expression." The audience responded enthusiastically to the speech, which was broadcast on three separate radio networks in Argentina. FDR was interrupted several times by "tumultuous applause," much like a State of the Union address back home.[n.4]

  The next day, thousands once again gathered outside, this time in heavy rain, to watch as the ^Indianapolis^ began its long journey back to the United States. The trip represented a thorough triumph, yet there was one thing that bothered FDR as his cruiser sailed out onto the open sea: It was the heckler. "Whay was I so slow?" the president complained, lamenting the lapse in his usually quick wit. "I should have answered ... 'That's right! Down with imperialism. That's why we are meeting in this conference.'" [n.5]

  Although not widely remembered as such, the Buenos Aires Conference stands as one of the more significant achievements in U.S. foreign policy during the mid-1930s. Both in rhetoric and reality the Buenos Aires Conference epitomized the Roosevelt administration's prewar approach to foreign policy. The proposal of the U.S. delegation espoused multilateralism─politically, culturally, and economically. Furthermore, these proposals bucked the popular mood within the United States by requiring both spiritual and a practical commitment to greater U.S. involvement in world affairs. [n.6] And the conference took place in Latin America, where the New Dealers first tested many of the initiatives they would later deploy on a global basis. [n.7]

  By far the most significant proposal in this regard─the only one introduced by the United States to make it into the final treaty─was the modest provision for a series of multilateral cultural exchanges between the nations of the Western Hemisphere. This agreement called for each of the twenty-one governments that signed the treaty to pay for the exchange of two graduate students per year, per country. It was not much. But it put the U.S. government in the business of "cultural diplomacy"─that is, the deliberate attempt to deploy cultural affairs in pursuit of foreign policy objectives. By the end of World War II, these simple exchanges had grown into a comprehensive program to shape the nation's image abroad, as U.S. officials combined cultual diplomacy with overseas propaganda, domestic information campaigns, and technological modernization initiatives to form the matrix of what became known as public diplomacy. Thus began the massive postwar project dedicated to winning "hearts and minds" around the world.


"Given Them a Share"

That these efforts started in Latin America was no accident. In fact, they must be understood as an essential expression of the Roosevelt administration's Good Neighbor Policy. FDR actually introduced the idea of the "good neighbor" in his inaugural─the address better remembered for "we have nothing to fear but fear itself..."─when he pledged to "dedicate this Nation to the policy of the good neighbor ... the neighbor who respects his obligations and respects the sanctity of his agreements in and with a world of neighbors." The president did not initially apply this idea to any particular region. Soon, though, the Good Neighbor Policy became the catchall label for the Roosevelt administration's much publicized attempt to scale back the arrogance of attitude and action that had prompted many Latinos to label his nation "El Coloso del Norte" ("the Colossus of the North"). [n.8] The United States officially renounced the sort of Big Stick diplomacy that had resulted in perpetual interference in the domestic politics of Latin American states over the past several decades. To back up his words with action, the president repudiated the Platt Amendment of 1901 (used repeatedly to justify intervention in Cuba), ordered the removal of U.S. marines from Haiti, and generally encouraged greater input from Latin American leaders about policies affecting their own countries. "Give them a share" was how Roosevelt described his administration's attitude towards Latin America. "They think they are just as good as we are, and many of them are." [n.9]

  This sort of tongue-in-cheek remark helps to explain why the Good Neighbor Policy has sometimes been viewed as a sham─as lofty rhetoric designed to facilitate a shift from military domination to economic hegemony. There is some truth to that accusation. However, critics of the Good Neighbor Policy have failed to address why a politician as skillful as Roosevelt would create, in the words of historian Bryce Wood, a "huge red, white, and blue target" for potential critics. The answer to that question lies in the role that Latin America played within the overall scope of U.S. foreign policy during the 1930s. [n.10]

  ( ... .... ) p.18

2015년 5월 7일 목요일

Dic / Usages: final piece


  • Toledo Mining has put the final piece in place in a deal to develop the Berong nickel venture in the Philippines.  ... Link
  • At last it was time for God to put the final piece in place in his work of creation. He had prepared a place and now it was time to put man in that place. ... Link
  • Often regarded by historians as the New Deal's final piece of legislation, the GI Bill not only helped keep the United States from falling back into depression, but it also dramatically expanded the middle class, increased home ownership exponentially an democratized higher education in ways that benefit us still.  ... Link
  • "Well, yes. But 'tis part of the plan I worked out. When all the pieces are in place─"
    "Mary," said Elizabeth, "I must hear this plan now."
    "I cannot tell you till I speak to Father." Many knew that Elizabeth and Bets were angry. "When I put the final piece in place, 'twill become clear."
    Mary sensed an air of frustration in that room as tangibly as if it had dimension. Since nothing more could be said, she turned and made her way out of the cottage. ... Link
  • This chinaware is a final piece of workmanship. ... Link
  • we now have the final piece in place for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football program.  ... Link
  • With this hire we are putting the final piece in place for the past years' economic development effort.   ...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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