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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발췌] 헤라클레이토스의 공간 원리와 엘리엇의 <네 사중주>



출처: 헤라클레이토스의 공간 원리와 엘리엇의 <네 사중주> (이철희 지음. 현대영어영문학. 58권 3호. 2014년 8월. 171-88.



※ 발췌:

( ... ... ) 이 글은 <네 사중주Four Quartet>를 감상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엘리엇이 정의한 시간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특히 엘리엇의 시간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공간 내에서의 사물의 이동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 ... ... )


II. 헤라클레이토스의 공간 원리

엘리엇은 <네 사중주>의 제사로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우주 만물의 이동 원리를 사용한다. ( ... ... ) 그 제사의 내용은 다음과 가다.

ⓐ로고스가 공통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지혜를 가진 것처럼 생활한다.

Although the Word (Logos) is common to all, most people live as if each of them had a private intelligence of his own.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하나이고 동일하다.

The way up and the way down are one and the same. (Quinn 14)


( ... ... ) 우선 첫 번째 제사는 "개인은 로고스와의 조화 또는 종속 관계"(Williamson 209)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 개개인은 로고스에 종속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 ... ) 그리고 두 번째 제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영고성쇠의 교리를 나타내는 말로써"(이종철 207)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매우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주장으로 곡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 ... )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로고스는 다음과 같다.

그가(헤라클레이토소) 말하려고 한 핵심 관념은 로고스 관념이다. 모든 사물이 그것에 따라 조직되고 또한 여러 가지 모습으로--전쟁, 투쟁, 불신 등으로--자신을 드러내는 바의 그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햄린 19)

( ... ) [이것을] 엘리엇의 <네 사중주>의 제1 악장인 <번트 노턴(Burnt Norton)>에 적용해 보면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 ... ... ) 그러므로 로고스를 중심으로 설정하고 사물의 이동 방향을 주시하면 올라가는 기리나 내려가는 길이나 동일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기독교 시각에서 로고스를 말씀 혹은 회전하는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정점"(기쉬 171)으로 간주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 ... ) 제1 악장인 <번트 노턴>은 제2 악장인 <이스트 코우커>, 제3 악장 <드라이 셀비지즈>와 제4 악장 <리틀 기딩>에 이르기까지 전체 4악장이 제1 악장의 제사로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 )

( ... ) 이와 같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 만물의 이동 원리[는] ( ... ) 구심점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원형 추들이 상하, 좌우로 이동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원추들이 좌우로 이동한다고 하더라도 위에 위치한 구심점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주]3  상부의 중심축을 로고스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하부에 위치한 원형 추들은 우주 만물을 상징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상부의 구심점은 아무런 움직임이나 변함이 없고 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잇는데, 엘리엇은 이것을 로고스라고 명명한 것이다. ( ... ) 결국 두 제사의 의미[를] 요약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을 생성시키고 변화시키는 원동력을 모순과 대립으로 보았으며 그 모순과 대립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로고스"(박영식 33)라고 정의한다. 결국 세상의 만물들은 생성과 변화를 보이는 반면에 영원히 변함없는 존재는 로고스 밖에 없다. 특이한 점은 여기서 "엘리엇이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라기보다는 변화 속에 존재하는 질서"(Gish 97)라는 것이다. 즉 엘리엇은 ( ... ) 변화 속에서도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불가피한 변화 속에서도 필연적으로 항상성을 보이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기제가 바로 로고스라는 것이다. ( ... )


III 공간 원리 적용의 실재

( ... ) 흥미로운 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 운행 원리를 엘리엇에게 적용하면 현재와 과거는 모두 미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모든 시간은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Time present and time past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If all time is eternally present
All time is unredeemable.


( ... ... ) 이와 같이 "엘리엇은 <네 사중주>의 도입부를 시간과 구원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명상으로 시작한다"(Rics 238). 다시 말해, "엘리엇은 <네 사중주>에서 시간의 안과 밖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합일점에 가장 관심을 두었으며"(Tamplin 154) 또한 "시간은 지속적으로 흘러가지만 로고스 안에서만은 영원하다"(Smith 256)는 전제를 설정하여 시간과 로고스와의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 ... ) 특히 <번트 노턴>은 종교적 언어와 이미져리에 의존해서 시간 밖에 존재하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생각이나 관념을 창조하려고 시도한다"(Scofield 197).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되찾을 수 없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육화를 지속적으로 변하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합일을 최상으로 간주하듯" 엘리엇에게 하나님고의 친교의 순간이란 ( ... ) 지속적으로 이어진 시간임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 ... ... ) 그러나 엘리엇의 시간은 형이상학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그 모습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색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있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는 것이다.

What might have been is an abstraction
Remaining a perpetual possibility
Onl in a world of speculation.

위와 같은 정의를 통해서 우리는 가상의 세계(미래)란 단지 영원한 가능성 속에서만 존재하며[,] 하나의 추상이란 미래가 단순히 어느 한 시점에서 종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가능성 속에서만 그 가상의 세계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엇은 이 간단한 시간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은 일은
한 점을 향하고,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What might have been and what has been
Point to one end, which is always present.

즉, "있을 수 있었던 것과 있었던 것은 추상적 사변이라기보다는 경험에 의해서 나온 감각"(Moody 144)이라는 점에서 시간은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거에 있엇던 것은 정확하게 미래를 의미하는 한 끝을 향하게 된다. 과거/현재/미래는 한 끝을 향하며 동시에 "항상 현존하여" 현재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 ... )

( ... ... ) 헤라이클레이토스의 세계관을 엘리엇은 <이스트 코우커>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다. 연달아서
집들은 서고, 쓰러지고, 허물어지고, 넓혀지고,
옮겨지고, 파괴되고, 복구되고, 또는 그 자리에
넓은 논밭이나 공장이나 도로가 있다.
낡은 돌이 새 건물에, 낡은 목재는 새 부레,
낡은 불은 재로, 재는 흙으로,
흙은 이미 살이고, 모피ㅣ고, 배설물이고,
사람과 짐승의 뼈이고, 곡식 대이고 잎이다.
집들은 살다 죽는다. 세우는 시간이 있고,
사는 시간, 생산하는 시간이 있다.
또는 바람이 흔들리는 유리창을 깨뜨리는 시간,
들쥐가 달음질치는 벽 판장을 흔드는 시간, 그리고
무언의 표어를 짜 넣은 해진 에라스 천 벽결이를 흔드는 시간이 있다.

In my beginning is my end. In succession
Houses rise and fall, crumble, are extended,
Are removed, destroyed, restored, or in their place
Is an open field, or a factory, or a by-pass,
Old stone to new building, old timber to new fires,
Old fires to ashes, and ashes to the earth
Which is already flesh, fur and faeces,
Bone of man and beast, cornstalk and leaf,
Houses live and die; there is a time for building
And a time for living and for generation
And a time for the wind to brek the loosened pane
And to shake the wainscot where the field-mouse trots
And to shake the tattered arras woven with a silent motto.

엘리엇은 위와 같이 헤라이클레이토스가 규정한 우주 만물의 "항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이미 시작은 끝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바로 생물의 탄생은 곧 죽음을 향해 시간 위를 질주하는 모습에 견줄 수 있다. 그러면서 엘리엇은 바로 그 항면의 모습을 여러 가지 상황으로 설명한다. (1) 연달아서 집들이 서고 쓰러지고 허물어지고 넓혀지고 옮겨지고, 파괴되고, 복구되고, (2) 그런데 그 자리에 다시 넓은 논밭이나 공장이나 도로가 생기며, (3) 낡은 돌은 새 건물에 사용되고, (4) 낡은 재목은 새 불에 사용되기, (5) 낡은 불은 재로 옮겨서 다시 사용되고 다시 재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 등 시공간적으로 열 가지의 변화와 변전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열 가지를 변화와 변전의 종결부로 맺고 다시 이어지는 연을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다"는 재단정의 진술로 이어진다. 이는 바로 시작이라는 시간은 이미 끝을 향한 것이고 끝은 다시 시작으로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 ... ... )

( ... ... )

우리의 유일한 건강은 병이다.
죽어가는 간호사에 복종하면
그의 끊임없는 간호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우리의 그리고, 아담의 저주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회복하자면 우리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야 한다.

온 지상은 우리의 병원이다.
파멸한 갑부가 물려준
그 속에서 우리의 건강이 튼튼하자면
우리는 우리를 버리지 않고, 도처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절대적인 아버지의 간호로써 죽어야 할 것이다.

Our only health is the disease
If we obey the dying nurse
Whose constant care is not to please
But to remind of our, and Adam's curse,
And that, to be restored, our sickness must grow worse.

The whole earth is our hospital
Endowed bythe ruined millionaire,
Wherein, if we do well, we shall
Die of the absolute paternal care
That will not leave us, but prevents us everywhere.

( ... ... )

회전하는 세계의 정지하는 일점에, 육도 비육도 아닌
그곳으로부터도 아니고 그곳을 향하여서도 아닌, 정지점 거기에 춤이 있다.
정지도 운동도 아니다. 고정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과거와 미래가 합치는 점이다. 그 곳으로부터 또는 그 곳을 향한 운동도 아니고,
상승도 하강도 아니다. 이 점, 이 정지점 없이는
춤은 없다. 거기에만 춤이 있다.

At the still point of the turning world. Neither flesh nor fleshless;
Neither from nor towards; at the still point, there the dance is,
But neither arrest nor movement. And we do not call it fixity,
Where past and future are gathered. Neither movement from nor towards,
Neither ascent nor decline. Except for the point, the still point,
There would be no dance, and there is only the dance.

( ... ... )

패턴의 세부는 운동이다.
열 개의 계단의 비유에서처럼.
욕망 자체는 동이고
그 자체는 좋지 못하다.
사랑은 그 자체가 비동이고
다만 동의 원인이고 궁극일 뿐,
초시간이고, 비 욕망,
시간의 양상이 아닌
비존재와 존재 사이의
영역의 형태로 파악된다.

The detail of the pattern is movement,
As in the figure of the ten stairs.
Desire itself is movement
Not in itself desireable;
Love is itself unmoving,
Only the cause and end of movement,
Timeless, and undesiring
Except in the aspect of time
Caught in the form of limitation
Between un-being and being.

( ... ... ) 이와 같은 논리로 추론해 볼 때 엘리엇은 <네 사중주>를 헤라이클레이토스의 우주 공간 속에서의 사물의 이동 원리를 바탕으로 창작했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IV. 나오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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