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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Ovid.
BC 43. 3. 20 로마 술모~AD 17 모이시아 토미스.
로마의 시인.
〈사랑의 기술 Ars amatoria〉,〈변형담 Metamorphoses〉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AD 8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으로 토미스로 추방되었다.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 그 이유지만, 그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로마 제국의 오지인 토미스에서 그는 계속 글을 썼고, 여기서 쓴 글 가운데에는 특히 〈슬픔 Tristia〉이 유명하다.
오비디우스는 흔히 후원과 동정의 대상이 되어왔으나, 그의 진정한 성격과 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가 합리주의자이며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유물론적인 시인 루크레티우스에게 본능적으로 공감했다. 그는 지나치게 회의주의적이었고 독자적인 지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를 제외하고는 어떤 대의명분에도 헌신하지 못했다. 그는 시에 대한 신념 속에서 살고 죽었으며, 이 신념은 〈사랑 Amores〉에서 시작하여 유배지에서 쓴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에 스며 있다. 시에 대한 그의 헌신은 절대적이었다. 낱말에 대한 감각적인 이해와 언어를 다루면서 느끼는 기쁨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해와 기쁨이었다. 이런 특성과 함께 그는 넘쳐 흐르는 상상력과 풍부한 독창력도 갖고 있었다. 인간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베르길리우스만큼 깊지는 않다 해도 그보다 더 넓었고, 아마 보통 사람에게는 오비디우스가 더 감동적이고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는 다정한 친구이자 익살스럽고 이해심 많은 연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문인이자 창조자이며 예술가였고,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의미에서의 시인이었다.
- 고대에 오비디우스가 후세의 시문학에 미친 영향은 주로 기법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는 애가 2행연구(二行聯句)를 완성했고, 6보격을 모든 목적에 맞는 운율과 유창한 의사 전달수단으로 만들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영향을 직접 받은 시인들조차도 거의 모든 시행에서 오비디우스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 중세에 오비디우스는 대다수의 고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념과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변형담〉은 그리스 신화의 풍요로움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력적인 통로를 제공했다.
- 그러나 중세뿐 아니라 그후에도 그의 주된 매력은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인간성(쾌활함, 동정심, 생기발랄함, 그림처럼 생생하고 감각적인 묘사)에서 나온다. 그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시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음유시인과 궁정연애를 노래한 시인들, 초서·셰익스피어·괴테 및 에즈라 파운드 등이 그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여자를 하나의 성(性)으로서 순수하게 좋아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바로 이런 인간적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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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자신이 직접 시의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비밀을 폭로했기 때문에 존경과 주목을 받았다. 〈사랑〉·〈사랑의 기술〉·〈사랑의 치료법〉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에 행한 방탕의 흔적을 읽을 수 있지만, 작품에 나타난 그의 주장은 대부분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적 태도에 속하는 것이었다. 사실 오비디우스는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존경할 만한 가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아주 젊었을 때 결혼했다가 곧 이혼했는데, 이 첫번째 아내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2번째 아내에게는 아무 비난도 하지 않았지만, 이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지체높은 귀족가문의 딸과 3번째로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안정되어 있었고 상호간의 애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비디우스의 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데, 이 딸은 아마 2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인 듯하다. 오비디우스는 독창적인 작품을 상당히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위대한 아우구스투스 통치기간의 마지막 시인인 호라티우스는 BC 8년에 죽었고, 오비디우스와 경쟁할 만한 시인은 아무도 없었음). 〈사랑〉의 마지막 시에서 오비디우스는 이제 곧 좀더 야심적인 주제를 다루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3가지 주요장르에 속한 작품을 발표하여 이 약속을 지켰다.
비극 〈메데이아 Medea〉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평론가인 퀸틸리아누스와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이 작품을 칭찬했고, 같은 주제를 다룬 세네카의 희곡에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오비디우스의 〈달력 Fasti〉은 로마의 1년과 종교축제를 설명한 책으로, 1개월에 1권씩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1~6월의 6권뿐이다. 그는 다양한 축제 모습을 묘사하고, 그 축제들의 전설적 유래를 추적하고 있다. 이런 '인과 관계를 다룬' 시는 헬레니즘 시대(BC 323 이후)의 시인들, 특히 칼리마코스의 특징이었는데, 오비디우스가 일부러 이 장르를 선택한 것은 '로마의 칼리마코스'를 자처하는 프로페르티우스의 주장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달력〉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문학 프로그램에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국민시였고, 어쩌면 지배층의 눈에 벗어난 작가가 총애를 되찾기 위해 쓴 시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황실에 대한 아첨과 애국적인 구절이 많이 들어 있으며, 그 때문에 이 작품은 훌륭한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성이 떨어진다.
〈변형담〉도 당시의 문학적·정치적 배경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아우구스투스 통치기간의 문인들 가운데 가장 '아우구스투스적'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조차도, 계관시인이라는 지위에 따르는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공식적인 시(주요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찬양하는 서사시 따위)를 요청받으면 내키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베르길리우스는 마침내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d〉를 썼지만, 이 시는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네이스〉는 발표되자마자 국민적 서사시로 인정받은 유일무이한 작품이었던 만큼 이후 시인들에게 1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즉 베르길리우스 이후, 역사나 신화를 정면으로 다루는 어떤 서사시도 〈아이네이스〉에 뒤처지는 작품이 될 것이었다. 오비디우스의 본능과 지성은 그러한 서사시에 숨어 있는 함정을 조심하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가 그랬듯이, 자기만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새로운 계획에 따라 서사시를 쓰기로 결정했다.
〈변형담〉은 전 15권으로 이루어진 장시로서 오늘날 남아 있는 오비디우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6보격 운문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신화나 전설 중에서 변형(변신)의 모티프가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 이야기들은 천지창조(혼돈이 질서로 변한 최초의 변형) 때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어서 신으로 격상되기까지(이것도 역시 내전이라는 혼돈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는 질서로 바뀐 마지막 변형임) 연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변형이라는 모티프의 중요성은 실질적이라기보다 표면적이며, 이 시의 근본적 주제는 열정으로, 이것은 시인이 사용하는 온갖 교묘한 이야기의 연결 및 배열 방식보다도 더 많은 통일성을 작품에 부여하고 있다. 오비디우스의 초기 시를 지배했던 성애에 대한 강조는 인간 감정(그가 묘사한 신들이란 인간에 다름없었음)의 거의 모든 형태에 대한 탐구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오비디우스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풍부한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재치와 수사적 표현의 뛰어남, 신화에 대한 지식, 서술 및 묘사의 타고난 재능, 독특하고 풍부한 상상력 등이 이 작품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로마의 시가 대부분 그러하듯 〈변형담〉도 매우 문학적인 바탕을 지닌 작품이다. 오비디우스가 읽어서 흡수한 엄청난 양의 그리스와 로마 시는 이 작품에서 창조적인 변용을 거쳐 독창적이고 유례없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의 문체 역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어법을 개성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이 시에 포함되어 있는 장르와 어조의 다양한 변화에 잘 맞추어져서 독자들이 상당히 긴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정되고 기분 좋은 속도로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소재와 소재를 다루는 기법에서 〈변형담〉은 아우구스투스 통치기간의 문학작품답지 않을 뿐더러, 언어를 제외하고는 로마적인 동시에 그리스적이기도 하다. AD 8년에는 이 작품이 아직 정식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오비디우스의 인생에 뜻밖의 재난이 닥쳐온 것은 그가 확고히 성공의 절정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이 순간이었다.
자료: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오비디우스
... 또한 문화의 중심지 아테네로 유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로 돌아와 약간 관리 경력을 쌓지만 곧 이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고자 마음을 굳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인들을 후원하는 메살라 코르비누스에 발탁되어 당시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티불루스 등의 시인 서클에 가담, 당시 유행했던 엘레게이아풍의 연애시로 필재를 휘둘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연애의 농락술을 교훈시풍으로 엮은 《사랑의 기술(Ars Amatoria)》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책이라 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연애시와는 결별하고 이야기시의 제작에 몰두, 필생의 대작 《변신이야기(Metamorphoses)》를 완성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하려던 《행사력(Fasti)》을 제작 중이던 서기 8년 황제로부터 돌연 로마 추방을 선고 받았는데 이 추방에 얽힌 경위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만년은 전반이 화려했던 것에 비해 비참했다. 흑해 연안의 벽지 토미스에서 호소와 애원이 담긴 서신을 고국에 띄우며 10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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